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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수치스럼의 역사 한자락

5.18 이후

by 黃薔 2017. 3. 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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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글이다. 일제시절 호구지책으로 어쩔수 없이 일제의 말단관리로 일제치하를 살아난 사람들이 많다. 생계를 위해 일제의 관리로 살았던 사람들이야 어쩌겠는가? 하지만 자진하여 적극적으로 일제를 위하여 동족과 식민지 백성을 탄압하고 고문하고 살해했다면 세월이 흘러도 엄벌에 처해야 살인마 전두환 같은 놈이 또 나오지 않을 거다. 불편하고 슬쩍 눈감고 싶고 얼렁뚱땅 구렁이 담넘어 가고 싶지만 두눈을 부릅뜨고 처다보고 단죄해야 한다. 두번 다시 오욕의 역사를 쓰지 않토록 ...] 


숨겨진 수치스럼의 역사 한자락 
친일파 청산의 이유가 선명해졌던 순간  


얼마전 미국 TV 방송국 History Channel 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콰이강의 다리를 포함한 버마 철로 건설에 동원되었던 포로들의 이야기를 방송하였습니다. 동남아에서 일본군의 전쟁 포로가 되었던 유럽군인들의 증언이 많앗던 내용이었지요. 

그런데 그 내용은 우리네 부모님들이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서도 흔히 들을 수 있었던 한국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만행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서도 그들이 저지른 온갖 잔혹한 일들을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살아 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경우는 흔하지 않았답니다. 

퇴근 후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잠시 틀었던 TV방송 인지라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하는 소리가 들리자 막 끄려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들린 “Korean”이란 단어에 갑자기 머리끝이 섬뜩하여 눈과 귀가 고정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많은 분들이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전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역사의 한자락이었습니다. 무려 25만명이나 되는 유럽군인들이 동남아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 중 몇 만명이 버마 철로 건설현장에 끌려가 노역을 하였답니다. 많은 포로들이 하루에 1000칼로리도 안되는 쌀죽으로 연명을 하며 영양 부족으로. 그리고 말라리아와 콜렐라와 같은 풍토병으로. 또 탈출하려 시도했다는 등의 죄목으로 총살당하여 일부 부대는 전체 포로인원의 47%까지 죽어 나갔다는군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포로들을 하루에 2시간씩 재우며 일이 좀 늦어지면 대나무로 구타하고 아주 쉽게 총살했답니다. 대나무로 얼기 설기 지은 포로들의 잠자리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쏟아지는 몬순 소나기를 피할수 없었답니다. 

이 포로들을 담당하는 일본군 간수들은 일본 정예군이 아니었다는군요. Second Ranked Troup 이라 표현할걸 보니 군대로 치면 질이 떨어지는 부대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부대에는 한국에서 징용당해온 한국인들이 제법 있엇다는군요.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혹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일본군 간수가 바로 일본군으로 징용나온 한국사람 이었답니다. 포로들이 Mr. Blood 라고 불렀다 하니 제게는 ‘흡혈귀’쯤으로 이해가 되는 군요. 그 Mr. Blood 는 일본이 패전을 하자마자 포로들에게 잡혀서 교수형에 쳐해졌다는 군요. 

살아오면서 사소한 일상들 조차도 쉽게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해자가 쉽게도 피해자로 둔갑되기도 하지요. 한국사람들은 일본이라고 하면 분노가 삭혀질 수 없는 피해자로 인식되어야만 하는줄 알고 살았답니다. 

90의 나이를 바라보는 노인이 된 살아남은 그 네델란드 노인이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일본군으로 징용나온 그 한국인 간수가 자행했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증언하는 그 방송 내용을 보며 같은 한국인으로서 너무나 수치스러워움을 느꼈습니다. 

일본의 침략 만행에 피해자이면서 그 만행에 협력한 한국인들의 심리연구와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어떠한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오랜세월이 지났지만 우리가 무슨 이유로 친일파를 척결하려하는지 그 이유가 선명하여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사실인데 저만 모르고 있었나요? 잘 모르셨다면 우리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콰이강의 다리 건설에는 연합군포로들은 단순 노역이 아니라 공병대출신이 참여한 듯 하다.


일본군 훈도시만 두른 한 연합군 군인이 측량기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콰이강의 다리는 일본군이 전선을 버마(미얀마)와 인도로 확전하기 위해 전쟁물자수송을 위해 필요한 루트였다.


현재와 같은 모습의 콰이강의 철교


죽음의 철길로 알려진 버마전선으로 통하는 철길


전쟁이 끝나서 해방된 연합군포로들이 자유의 커피를 마시고 있다.


한 잡지에 실린 당신 포로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에서 연합군포로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미군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지 23년 만인 1968년, 연합군 포로들이 런던에서 생환의 기쁨을 자축하는 모임을 가졌다.


연합군 희생자 6,982명이 잠들고 있는 칸차나부리의 연합군 묘지전경


연합군 포로들이 계곡을 따라 버마전선으로 물자를 수송하고 있다.


한 포로수용소에서 부상자를 수술하는 장면


수용소 의무실의 대나무로 만든 치과진료기구세트


이 한 장의 그림으로 당시의 식량사정을 잘 알 수 있을것 같다.


콜레라 등의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한 모습


열대지방의 비위생적인 화장실이 전염병의 위험성을 높히고 있다.


의약품공급이 절대부족하여 물고기가 상처를 갈아 먹게하는 자연치유법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코끼리와 함께 죽음의 철길공사에 동원된 연합군포로들


연합군 포로들한테 행해진 잔혹한 고문장면들


일본의 항복선언은 8월15일에 있었지만 인도차이나전선에는 완전한 해방이 늦어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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