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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발굴] 1981년 1월 28일 교육자출신 LA 민주화인사 시사평론가 은호기 선생님의 전두환 암살 미수 사건의 전모

80년5월18일

by 黃薔 2023. 7. 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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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M19bGHE590

샌프란시스코의 민주화인사 장주암 선생님의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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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의 민주화인사 장주암 선생님의 두번째 이야기는 장주암 선생님이 친형 장소암 선생님과 함께 1981년 1월 28일 LA를 방문하여 한인타운 올림픽 블러바드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전두환의 차를 헌트에서 견고한 유리가 금이갈 정도로 몽둥이로 내리쳐 카퍼레이드를 하던 전두환이 카퍼레이드를 중단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했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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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월 새해 들어 LA총영사관의 박민수 총영사를 포함 전공관원들은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당시 서슬이 시퍼런 신군부의 수장 전두환이 2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한 방미의 첫 기착지가 LA였기에 ‘대통령 초청 교민 간담회’ 등등의 준비로 연일 밤을 새울때입니다. 이미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전두환 방미 선발대로 와서 전두환이 묵을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민수 제 7대 LA총영사와 이민휘 LA한인회장을 포함 40여 한인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전두환 내외 범교포환영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총영사관 동포담당 영사는 1월 28일 저녁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개최될 ‘전두환 교민 간담회’에 참석할 동포 인사들 명단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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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청와대와 외교부에서 시달된 공문에는 교민간담회에 참석자를 5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LA에 한국의 대통령이 방문은 근 18년만에 처음이라 화제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 광주학살로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던 전두환이기에 더욱 유명세가 따랐습니다. 하여간 교민간담회에 너도나도 초청을 받으려고 공관이나 외교부 그리고 청와대까지 줄을 대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인단체장이 우선적으로 초청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총영사관에 한인단체현항 보고서가 밀려들었습니다. 당시 총영사관에는 불과 100여개 단체 현항서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두환 초청교민간담회에 초청을 받으려고 단체 현항보고서가 총영사관으로 약 300통이 한꺼번에 접수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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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월 새해 들어 LA총영사관의 박민수 총영사를 포함 전공관원들은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당시 서슬이 시퍼런 신군부의 수장 전두환이 2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한 방미의 첫 기착지가 LA였기에 ‘대통령 초청 교민 간담회’ 등등의 준비로 연일 밤을 새울때입니다. 이미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전두환 방미 선발대로 와서 전두환이 묵을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민수 제 7대 LA총영사와 이민휘 LA한인회장을 포함 40여 한인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전두환 내외 범교포환영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총영사관 동포담당 영사는 1월 28일 저녁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개최될 ‘전두환 교민 간담회’에 참석할 동포 인사들 명단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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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청와대와 외교부에서 시달된 공문에는 교민간담회에 참석자를 5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LA에 한국 대통령의 방문은 근 18년만에 처음이라 화제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 광주학살로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던 전두환이기에 더욱 받았습니다. 하여간 교민간담회에 너도나도 초청을 받으려고 공관이나 외교부 그리고 청와대까지 줄을 대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인단체장이 우선적으로 초청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총영사관에 한인단체현항 보고서가 밀려들었습니다. 당시 총영사관에는 불과 100여개 단체 현항서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두환 초청교민간담회에 초청을 받으려고 단체 현항보고서가 총영사관으로 약 300통이 한꺼번에 접수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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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보고를 들은 전두환은 ‘교민 단체장은 모두 초청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애초 500명 예상의 초청객이 두배로 늘어나 약 1,000명이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1981년 1월 28일부터 11일 동안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기 위해 워싱턴DC로 가기 전 LA를 첫 기착지로 삼았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전두환의 LA방문은 여러 기록들을 양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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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은 버스 20대를 대절해 2,500여명이 LA공항 환영 행사에 나갔습니다. 사상 최대 인파였습니다. LA총영사관은 환영객들을 위해 LA공항에 10개의 간이화장실까지 차렸습니다. 전두환이 숙소로 가기 전 코스인 코리아타운 중심인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 노먼디와 웨스턴 구간에 태극기 180쌍이 꽂혔고 플랫카드까지 내걸렸습니다. 거리에는 한복을 입은 2만명의 한인들이 나왔습니다. 이때 전두환이는 박정희 대통령 때 기증한 우정의 종도 전두환이 첫 타종했습니다. 인도의 50여 시위대는 “전두환 물러가라 하야하라! 5·18 광주 학살의 우두머리 전두환 개새끼를 죽이자!…” 시위대는 욕설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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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출신 은호기 선생님이 준비해간 권총으로 전두환을 사살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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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위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려간 민주인사 장소암, 장주암 형제분과 권순태, 최명배 4분을 포함하여 LA의 노길남, 예정웅, 김운하, 김용, 김현한, 김상돈 등 미국 전역에서 모인 50여명의 동포들이 광주학살에 대한 항의로 관까지 만들어 올림픽가에 나왔습니다. 전두환의 카퍼레이드 차가 앞을 지나면 관을 던저 차앞을 막아 멈춰 세운후 교육자출신 은호기 선생님이 준비해간 권총으로 전두환을 사살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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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50여명의 반대집회 주위로 3백명가량의 정장차림의 백인 미국인들이 모여들어 장소암 선생님은 미국인들도 한국의 학살자를 구경하러 나왔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바로 앞을 지날때 이들이 갑자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50여 반대집회자 사이사이로 끼어들어 난장판을 만들고 관을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때 '전두환이차다'라는 말을 듣고 동생 장주암 선생님이 들고 있던 각고목으로 전두환이 탄 차 앞유리창을 내리쳤고 금이 가는것을 보고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전두환이 탄 오픈카는 앞유리창이 금이 간체 카퍼레이드를 중단하고 혼비백산하여 경호원들에 둘러싸인체 숙소인 센추리 플라자 호텔로 꽁무니가 빠지게 속력을 내서 달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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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을 사살하려던 은호기 선생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참고로 은호기 선생님은 전라북도 고부출신으로 1939년 10월 30일에 태어나 고부국민학교와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후 1970년 유학차 도미하여 LA에서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며 5.18 밀항자 합수 윤한봉 선생을 보살펴주기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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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한 미국경호대의 행동으로 전대통령 일행을 놓친 한인동포 시위대는 좀 더 본때를 못 보여줘 아쉬운 표정으로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미국경찰은 한국 학살독재자에 대한 한국계의 당연한 의견표현으로 보고 일체의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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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전두환은 4년 뒤인 1985년 4월 24일 조심스럽게 LA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가던 길에 LA에 들른 전두환은 25일 새벽 8가 할매집 식당을 찾아 1981년 1월 망신스럽게 도망치던 꼴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위세를 떨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민주인사들은 시위를 통해 전두환의 무력 정권찬탈과 광주학살 등을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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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기 재미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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