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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암과 지미 카터

80년5월18일

by 黃薔 2023. 1. 1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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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M19bGHE590

샌프란시스코의 민주화인사 장주암 선생님의 첫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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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암과 지미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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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 버섯에 관심있는 하이킹 모임에 참석했다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거주하시는 한국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중 한분이 장주암 선생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공로목사였던 고 장희진 목사님의 자제분으로 형님 장소암 선생님과 더불어 북미주지역 민주화인사로 한국의 군사독재시절 한국의 민주세력을 물심양면 도와주셨던 분입니다. 기회되면 살아오신 여정을 인터뷰해보겠다고 부탁도 드렸습니다. 아무튼 샌프란시스코의 민주화인사 장주암 선생님의 첫 이야기는 1980년 5월 26일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에게 군부독재자 전두환의 광주학살을 멈추게하고 지원을 중단하라는 전보를 보낸 이야기입니다. 그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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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문을 번역 하자면 "메일그램 서비스 센터 미들타운, VA 22645 (MAILGRAM SERVICE CENTER MIDDLETOWN, VA 22645)" 전보국 주소와 "웨스턴 유니온 메일그램 미국 메일(WESTERN UNION MAILGRAM US MAIL)"라는 로고가 있고
전보등록번호와 발송국 지역과 발송널자와 시간이 다음과 같이 있습니다.
"4-0019038147002 05/26/80 ICS IPMBNGZ CSP SFOB
1 4159948743 MGM TDBN DALY CITY CA 05-26 0535A EST"
발송날자가 제가 사전검속되어 보안대에서 죽음을 넘나들던 고문을 받던 미국동부시간 1980년 5월 26일 아침 5시 35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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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송인의 성함과 주소가 계속 이어집니다.
주암 장(CHUARM CHANG)
4324번지 칼란 블러바드(4324 CALLAN BLVD)
데일리 시티 CA 94015 (DALY CITY CA 9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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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메일그램은 다음 메시지의 확인 사본입니다(THIS MAILGRAM IS A CONFIRMATION COPY OF THE FOLLOWING MESSAGE:)
받는 사람은 "지미 카터 대통령 (PMS PRESIDENT JIMMY CARTER) 백악관 (WHITE HOUSE) 워싱턴 DC(WASHINGTON DC)
전보내용은 "광주 시민 학살을 중단하고 군사 독재자가 아닌 한국을 지원하십시오. (STOP KILLING KWANGJU CITIZENS, SUPPORT KOREA NOT MILITARY DICTATOR.)" 입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발송인
주암 장(CHUARM CHANG)
4324번지 칼란 블러바드(4324 CALLAN BLVD)
데일리 시티 CA 94015 (DALY CITY CA 94015)
동부시간 5시 36분 (05:36 EST)
MGMCOMP MGM
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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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1980년 5월 26일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에게 군부독재자 전두환의 광주학살을 멈추게하고 지원을 중단하라는 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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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보가 발송된지 2달 5일만인 1980년 7월 31일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 빌 J. 다이스가 다음과 같은 답장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국무부 문장과 주소가 있는 그 편지를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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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부 (DEPARTMENT OF STATE)
워싱턴 D.C. 20520 (Washington, D.C. 2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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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7월 31일 (July 31,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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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암 (Chuarm Chang)
칼란 대로 4324번지 (4324 Callan Blvd.)
데일리 시티, 캘리포니아 94015 (Daly City, California 9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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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암님께: (Dear Chuarm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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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7일 완전 비상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대한민국의 상황에 대해 카터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주신 귀하의 전보에 감사드립니다. 회신이 늦어진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Thank you fr your telegram to President Cater concerning developments in the Republic of Korea since the declaration of full emergency martial law on May 17. We regret the delay in this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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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이익이 한국에서 헌법 개혁의 진전과 한국 국민의 지원을 받는 보다 광범위한 기반의 문민 정부에 의해 가장 잘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엄령의 연장, 모든 정치 활동의 중단, 정치 지도자의 체포 등 최근 정치 자유화 과정의 심각한 차질에 대해 공개적으로나 비공개적으로 깊은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We believe that our fundamental interest in peace and stability in Northeast Asia would best be served in Korea by progress toward constitutional reform and by a more broadly based civilian government supported by the Korean people. Therefore, we have expressed publicly and privately our deep concern over the recent serious setback in the political liberalization process -- the extension of martial law, the suspension of all political activity, and the arrest of political lea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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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일관되게 양측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무력이 필요할 경우 사상자를 피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청했습니다. 광주의 당면한 위기가 종식된 지금, 우리는 한국 정부가 남아 있는 보다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를 희망합니다. (During the riots in Kwangju, we consistently urged both sides to reslve the problem peacefully. We also asked that every effort be made to avoid casualties if force were required. Now that the immediate crisis in Kwangju is over, we hope the Korean Government will address the more fundamental political issues which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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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Sincerely,)
윌리엄 J. 다이스 (William J. Dyess)
공보담당 차관보 (Assistant Secretary-Designate for Public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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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공보담당 차관보 (Assistant Secretary-Designate for Public Affairs) 윌리엄 J. 다이스 (William J. Dyess)의 답장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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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보와 그 답장을 보니 일제시절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의 이대위 목사님이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박해를 받던 샌추럴밸리의 한인농부들의 사정을 미국무부장관에게 전보를 보내 대한인국민회가 나라잃은 조선의 영사업무를 획득하여 조선농부들을 돕고 조선인의 미국입출국을 도왔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전두환 폭압 피해자의 한사람으로서 장주암 선생님이 그 전보를 보내실때의 마음이 느껴져 너무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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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의 민주화인사 장주암 선생님의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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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의 민주화인사 장주암 선생님의 두번째 이야기는 장주암 선생님이 친형 장소암 선생님과 함께 1981년 1월 28일 LA를 방문하여 한인타운 올림픽 블러바드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전두환의 차를 헌트에서 견고한 유리가 금이갈 정도로 몽둥이로 내리쳐 카퍼레이드를 하던 전두환이 카퍼레이드를 중단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했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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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월 새해 들어 LA총영사관의 박민수 총영사를 포함 전공관원들은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당시 서슬이 시퍼런 신군부의 수장 전두환이 2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한 방미의 첫 기착지가 LA였기에 ‘대통령 초청 교민 간담회’ 등등의 준비로 연일 밤을 새울때입니다. 이미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전두환 방미 선발대로 와서 전두환이 묵을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박민수 제 7대 LA총영사와 이민휘 LA한인회장을 포함 40여 한인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전두환 내외 범교포환영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총영사관 동포담당 영사는 1월 28일 저녁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서 개최될 ‘전두환 교민 간담회’에 참석할 동포 인사들 명단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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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청와대와 외교부에서 시달된 공문에는 교민간담회에 참석자를 5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LA에 한국 대통령의 방문은 근 18년만에 처음이라 화제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1980년 광주학살로 전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던 전두환이기에 더욱 받았습니다. 하여간 교민간담회에 너도나도 초청을 받으려고 공관이나 외교부 그리고 청와대까지 줄을 대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인단체장이 우선적으로 초청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총영사관에 한인단체현항 보고서가 밀려들었습니다. 당시 총영사관에는 불과 100여개 단체 현항서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전두환 초청교민간담회에 초청을 받으려고 단체 현항보고서가 총영사관으로 약 300통이 한꺼번에 접수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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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전두환 LA방문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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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보고를 들은 당시 청와대는 ‘교민 단체장은 모두 초청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애초 500명 예상의 초청객이 두배로 늘어나 약 1,000명이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1981년 1월 28일부터 11일 동안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기 위해 워싱턴DC로 가기 전 LA를 첫 기착지로 삼았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전두환의 LA방문은 여러 기록들을 양산했습니다. 한인들은 버스 20대를 대절해 2,500여명이 LA공항 환영 행사에 나갔습니다. 사상 최대 인파였습니다. LA총영사관은 환영객들을 위해 LA공항에 10개의 간이화장실까지 차렸습니다. 전두환이 숙소로 가기 전 코스인 코리아타운 중심인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 노먼디와 웨스턴 구간에 태극기 180쌍이 꽂혔고 플랫카드까지 내걸렸습니다. 거리에는 한복을 입은 2만명의 한인들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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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사 장소암 장주암 형제분과 같은 ‘광주민주화’ 학살에 대한 동포들의 항의로 관까지 올림픽가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 기증한 우정의 종도 전두환이 첫 타종했습니다. 인도의 시위대 물결은 “전두환 물러가라 하야하라! 5·18 광주 학살의 우두머리 전두환 개새끼를 죽이자!…” 시위대는 욕설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오픈카 퍼레이드를 하던 전두환의 차 앞유리창을 몽둥이로 내리쳐 견고한 유리가 금이갈 정도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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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민주인사 장소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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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보고를 들은 전두환은 ‘교민 단체장은 모두 초청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애초 500명 예상의 초청객이 두배로 늘어나 약 1,000명이 센추리 플라자 호텔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1981년 1월 28일부터 11일 동안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기 위해 워싱턴DC로 가기 전 LA를 첫 기착지로 삼았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전두환의 LA방문은 여러 기록들을 양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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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은 버스 20대를 대절해 2,500여명이 LA공항 환영 행사에 나갔습니다. 사상 최대 인파였습니다. LA총영사관은 환영객들을 위해 LA공항에 10개의 간이화장실까지 차렸습니다. 전두환이 숙소로 가기 전 코스인 코리아타운 중심인 올림픽 불러바드 선상 노먼디와 웨스턴 구간에 태극기 180쌍이 꽂혔고 플랫카드까지 내걸렸습니다. 거리에는 한복을 입은 2만명의 한인들이 나왔습니다. 이때 전두환이는 박정희 대통령 때 기증한 우정의 종도 전두환이 첫 타종했습니다. 인도의 50여 시위대는 “전두환 물러가라 하야하라! 5·18 광주 학살의 우두머리 전두환 개새끼를 죽이자!…” 시위대는 욕설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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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출신 은호기 선생님이 준비해간 권총으로 전두환을 사살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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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위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려간 민주인사 장소암, 장주암 형제분과 권순태, 최명배 4분을 포함하여 LA의 노길남, 예정웅, 김운하, 김용, 김현한, 김상돈 등 미국 전역에서 모인 50여명의 동포들이 광주학살에 대한 항의로 관까지 만들어 올림픽가에 나왔습니다. 전두환의 카퍼레이드 차가 앞을 지나면 관을 던저 차앞을 막아 멈춰 세운후 교육자출신 은호기 선생님이 준비해간 권총으로 전두환을 사살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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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50여명의 반대집회 주위로 3백명가량의 정장차림의 백인 미국인들이 모여들어 장소암 선생님은 미국인들도 한국의 학살자를 구경하러 나왔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이 바로 앞을 지날때 이들이 갑자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50여 반대집회자 사이사이로 끼어들어 난장판을 만들고 관을 내동댕이쳤습니다. 그때 '전두환이차다'라는 말을 듣고 동생 장주암 선생님이 들고 있던 각고목으로 전두환이 탄 차 앞유리창을 내리쳤고 금이 가는것을 보고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전두환이 탄 오픈카는 앞유리창이 금이 간체 카퍼레이드를 중단하고 혼비백산하여 경호원들에 둘러싸인체 숙소인 센추리 플라자 호텔로 꽁무니가 빠지게 속력을 내서 달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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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을 사살하려던 은호기 선생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참고로 은호기 선생님은 전라북도 고부출신으로 1939년 10월 30일에 태어나 고부국민학교와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후 1970년 유학차 도미하여 LA에서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며 5.18 밀항자 합수 윤한봉 선생을 보살펴주기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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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한 미국경호대의 행동으로 전대통령 일행을 놓친 한인동포 시위대는 좀 더 본때를 못 보여줘 아쉬운 표정으로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미국경찰은 한국 학살독재자에 대한 한국계의 당연한 의견표현으로 보고 일체의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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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전두환은 4년 뒤인 1985년 4월 24일 조심스럽게 LA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가던 길에 LA에 들른 전두환은 25일 새벽 8가 할매집 식당을 찾아 1981년 1월 망신스럽게 도망치던 꼴을 만회하기라도 하듯 위세를 떨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민주인사들은 시위를 통해 전두환의 무력 정권찬탈과 광주학살 등을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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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사들이 작고해가는 지금 귀중한 사료들을 발굴하기 시작하여 그 첫번째와 두번째 사료를 맛보기로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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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암 선생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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