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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보'-'공화국의 품에 안겨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쓴 재능있는 작가'라는 제목의 2020년 2월 29일자 '박태원의 삶과 문학' 기사 전문]

이야기

by 黃薔 2020. 3. 8.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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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 그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쓴 재능있는 력사소설가이다.

그는 망국의 비운이 짙게 드리웠던 1909년 12월의 추운 겨울날 서울의 어느 한 약제사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부친의 덕으로 빈손을 빨지 않으며 성장하였고 일본에 건너가 류학까지 하게 되였다. 그러나 굴욕적인 민족적모욕과 가증되는 학비난으로 그는 중도에서 사각모를 벗어던지고 귀향길에 오르게 되였다.

고향땅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갈마드는 문학에 대한 야릇한 호기심은 그의 눈길을 그냥 원고지에로 쏠리게 하였다. 사실 14살때 벌써 《입학》이라는 작문으로 호평을 받았던 그는 그후에 똘스또이, 듀마와 같은 이름난 작가들의 소설을 시간가는줄 모르고 탐독하였었다.

그는 종내 문학의 길에 뛰여들었고 1930년 잡지 《신생》 10호에 처녀작인 단편소설 《수염》을 발표하였다. 첫 작품에 대한 평가가 그만하면 괜찮았다.

이때부터 그의 본격적인 창작활동이 시작되였다. 박태원은 24살 나던 해인 1933년에 문학친목단체인 《9인회》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면서 다음해에 단편소설집 《구보씨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1935년에 첫 장편소설 《청춘송》을 내놓은데 이어 여러편의 장편소설들을 련속 발표하였다. 작품들은 모두 섬세한 세부묘사와 진지하고 치밀한 구성, 세련된 언어구사로 하여 다른 소설들에서 보기 힘든 높은 예술적기교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박태원은 자기의 작품들에 대해 점점 신심을 잃기 시작하였다. 자기의 작품이 부르죠아문단에서는 인기가 있었지만 근로인민대중 속에서는 좋은 반향을 들을 수 없었고 지어 랭담할 정도로 차별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차츰 짙어가는 번민속에서 그는 이웃나라의 력사소설과 민족고전들도 번역하고 또 《홍길동전》, 《리순신 장군》과 같은 력사소설들을 쓰기도 하면서 새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창작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가져다준것은 홍명희의 장편력사소설 《림꺽정》이였다. 당시 장편력사소설 《림꺽정》에 대한 반영이 대단했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써왔는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떨쳐나선 인민의 지향을 외면한채 가정잡사에 빠져 돌아가는 못난이들을 그려왔구나. …

그래, 나도 단순한 력사소설이기 전에 짓눌린 겨레의 넋과 민족의 존엄에 대한 책을 쓰자. 이 길만이 진정한 애국자로 사는 길이며 참된 문인이 되는 길이다!)

그때는 벌써 그의 나이가 40대로 치닫고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락심하지 않았고 얼마후에는 장편력사소설 《임진왜란》을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향은 혹평에 가까웠다. 그는 아이들에게 큰소리 한번 못 칠 정도로 온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이였지만 자기가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굴함없이 뚫고나가는 강인한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는 장편소설 《림꺽정》을 읽고 또 읽으며 사색을 거듭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만세의 우렁찬 웨침이 삼천리강산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남조선에 기여든 외세의 군화발에 짓밟혀 해방의 기쁨으로 들끓던 서울의 거리거리는 또다시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징그러운 양키문화가 오물처럼 범람하였다.

그속에서 진정한 력사소설을 쓴다는것은 허황한 꿈에 불과했다. 박태원은 당초의 계획을 일단 접어놓고 《략탈자》를 비롯한 여러편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50년 6월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침략자들의 무력침공을 격퇴하고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인민군대에 의해 해방된 서울에서 박태원은 난생처음 인간다운 생활을 체험하였다.

하기에 그는 조국앞에 준엄한 시련이 닥쳐온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서슴없이 북행길에 올랐고 용약 종군작가가 되여 인생의 새 출발을 하였으며 그 나날 중편소설 《조국의 기발》, 《조국의 품》 그리고 많은 전투실화들을 써서 인민군군인들과 후방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그자신이 말한바와 같이 해방전과 남조선에서의 창작생활은 《사회현실과 동떨어진 순수문학의 상아탑속에서 벗어나지 못한》것이였다. 전승의 축포가 터져오르자 그는 당시 사회과학원의 력사연구소와 중앙도서관, 대학의 도서관들, 력사박물관, 민속박물관, 모란봉과 대성산, 개성과 해주, 구월산의 력사유적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 력사소설을 창작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쉬임없이 연구하였다.

하여 1 9 6 5 년 에 장편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1, 2부를 발표하였다.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향은 대단했다. 수십통의 편
지가 매일같이 날아들었고 어떤 독자는 너무 흥분되여 밤늦게 작가의 집에 찾아오기까지 했다.

흔히 소설가들은 장편소설을 하나 쓰고나면 바다물을 한번에 통채로 들이마신것이나 같다고 말하군 한다.

(아, 이 멋에 피를 말리우고 뼈를 깎으며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고있던 홍명희선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서울에서 동무의 〈천변풍경〉을 읽고 재간있는 사람이라는것은 알았지만 력사소설도 쓰는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수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잘 썼습니다.》

며칠후 그는 안해와 함께 오래전부터 존경해오던 홍명희선생을 만났다. 홍명희선생은 그날 박태원에게 자기는 서울에서 많은 력사자료들을 볼수 있어 《림꺽정》을 쓰기 쉬웠는데 전쟁으로 자료들이 다 없어진 지금 동무는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쓸수 있었는가고 하면서 소설을 정말 잘 썼다고 거듭 감탄하였다. 그리고는 박동문 시력이 좋지 않으니 필요할거요라고 하면서 자기가 쓰던 확대경까지 내주었다.

그러나 박태원은 자기보다 80이 불원한 홍명희선생에게 더 필요할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굳이 사양하였다.

이렇게 진정한 력사소설의 첫 자욱을 뗀 그는 련이어 다음 소설창작에 달라붙었다.

《흐르지 않는 물, 고인물은 썩기마련이다. 강물이 흐른다는것은 바다로 간다는것을 의미하며 바다로 간다는 것은 진보를 의미하는것이다.》

이것은 박태원이 늘 주장하던 신조였다.

박태원의 비상한 정열은 주위사람들을 감동시켰는데 그는 력사지식뿐만아니라 예술, 미술, 음악을 비롯한 정치와 경제, 문화에 대한 학습에도 상당한 힘을 넣었다.

열정으로 불타던 그에게 악몽같은 시기가 닥쳐왔다. 서울에 있을 때 앓았던 병으로 몹시 낮아졌던 시력이 끝내 치명적인데까지 이르렀던것이다. 그의 시신경은 200자원고지에서 단 한자밖에 알아볼수 없을 정도였다. 급격히 낮아지는 시력장애로 그는 원래의 창작계획을 바꾸어 《갑오농민전쟁》 1, 2, 3부를 쓰기로 작정했다. 많은 독자들이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읽고 작가가 혹시 전주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사실 박태원은 서울태생이였고 전라도에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전라도를 자기의 고향처럼 속속들이 알기 위하여 지도작업을 열심히 하였고 그곳 전주의 마을이며 숲이며 정자며 큰 소나무며 하는것들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돌렸었다. 그리고 불편한 몸이지만 안해와 함께 주변농촌으로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생활에서 표면상에 드러난것이였을뿐이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소설을 계속 쓰자. 우리 인민의 의의있는 과거투쟁사를 가지고 력사소설을 쓰라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집행하지 못한 작가는 죽을 권리도 없다!)

이것이 바로 그의 가슴속에 용암처럼 굳어진 신념이였다.

그는 1977년 4월 드디여 《갑오농민전쟁》 제1부를 세상에 내놓았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그가 쓴 장편력사소설을 친히 읽어보시고 소설을 참 잘 썼다고 교시하시면서 박태원동무가 력사를 많이 알고있는것 같다고, 박태원동무와 같이 력사소설을 쓰는 사람이 귀하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우리 나라에 력사소설이 얼마 없다보니 사람들이 지난날 력사와 세상물계를 잘 모르고있다고 하시며 작가들이
주체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력사소설을 많이 쓰도록 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집에 찾아온 일군으로부터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내용을 전달받은 박태원은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그는 더욱 놀라운 사실에 접하게 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장편력사소설 《갑오농민전쟁》 제1부가 출판되자 작가를 표창하고 대를 두고 전할 귀중한 선물을 보내도록 하시였으며 소설을 어버이수령님께 올리셨다는 것이다. 그후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박태원선생의 일흔번째 생일을 맞으며 은정어린 생일상을 보내주시였다.

(김정일장군님! 이 박태원이 심장의 고동이 멈추지 않는 한 장군님께서 쥐여주신 필봉을 억세게 틀어쥐고 살겠습니다.)

그는 그날의 맹세를 지켜 《갑오농민전쟁》 제2부를 출판하고 련이어 제3부창작을 시작하였다.

그때 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였다. 의사소통의 유일한 방법이였던 구술조차도 할수 없게 되였던것이다. 그 사실을 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은정어린 보약들을 보내주시였다.

마를줄 모르는 그 사랑에 떠받들려 의식을 회복한 그는 자기의 소설창작을 위해 말없는 정성을 다 기울여온 안해에게 《갑오농민전쟁》 제3부의 구상과 형상의도를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손목시계를 가리키였다.

비록 말은 못했지만 남편의 속깊은 심중을 충분히 읽을수 있었던 그의 안해는 말하였다.

《여 보 , 절 믿으세요. 장군님의 은덕을 잊지 않고 꼭 소설을 완성하겠어요.》 이렇게 되여 그의 안해는 남편의 심혈이 깃든 원고배낭을 메고 우산장창작실로 떠나게 되였고 그로부터 2년후인 1986년 봄 장편소설의 제3부원고를 완성하였다.

박태원은 쏟아져나오는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다. 자기를 대신하여 그동안 숱한 고생을 해온 안해에 대한 고마움의 눈물이였고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대해같은 은덕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되였다는 기쁨의 눈물이였다.

그로부터 몇달후 작가는 행복한 미소속에 눈을 감았다. 작가는 떠나갔지만 그가 생전에 그토록 바랬던 장편력사소설 《갑오농민전쟁》 제3부는 드디여 출판되였다. 책표지에는 작가와 그의 안해 권영희녀성의 이름이 나란히 찍혀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10여년이 지난 주체87(1998)년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희미해져가던 박태원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두번다시 살수 없는 한생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행복한 삶은 어떤것인가. 박태원선생과 같이 자기 령도자의 기억속에, 인민들의 추억속에 죽어서도 영생하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인것이다.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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