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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신작 단편소설 '활착']

5.18의 미래

by 黃薔 2021. 6. 2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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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소설 '활착'은 '문학들 2021.여름 제64호'이라는 문학잡지에 실린 단편소설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원하는 우수문학잡지이고, 시, 소설, 동화, 평론 등을 아우르는 종합 문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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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여류소설가 은미희 선생님께서 송구하고 영광스럽게도 부족한 저를 대상으로 '활착'이라는 단편소설을 문학잡지 '문학들 2021 여름 제 64호'에 내주셨습니다.

그 '활착'이라는 단편소설을 작가 은미희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공개합니다.

활착에 등장하는 노란 장미가 어떤 사람인지 간단한 감상평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곳에 소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은미희 작가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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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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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제위께. 작가님께서 제 블로그에 있는 저에 대한 논픽션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집필하셨습니다. 제 블로그에 올려진 게시물의 분량이 방대하여 작가님이 블로그를 통해서 알거나 믿는 사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지만, 작가님이 믿는 것과 실제와의 차이, 또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로 말미암아 그 내용이 사실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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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 실제와 차이나는 점을 몇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점은 작가님의 양해를 구하여 작품 말미에 첨부합니다. 또한, 작가님께서 차후에 작품집에 수록 할때 이 부분들을 바로 잡아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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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에서 제가 제 각시를 만난 때가 제 각시가 간호장교였을 때는 아니었습니다. 제 각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제 각시가 대구통합병원 옆에 있었던 간호사관학교 4학년 생도였을 때였습니다. 그 점이 중요한 것은 규정에 장교와 사병의 교제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여 간호장교들의 명예를 실추시킬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제각시를 만났을때는 사병환자와 간호사관학교 4학년 생도였을 때입니다. 또 만났던 장소는 대구통합병원내 성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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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각시가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간호장교가 되어 대구통합병원 옆에 있었던 국군간호사관학교를 떠나 수도통합병원에서 간호장교로 복무할때는 저는 퇴원하여 자대로 복귀하였을 때입니다. 실제로 제 각시와 사귀게 된 때는 제가 전역하여 민간인 신분일때 부터입니다. 즉 사병과 장교가 아닌 민간인과 간호장교의 사귐이었던 거지요.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제 각시에게 있어서 이점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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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방후 초대 창경궁 식물원장으로 서구식 식물원을 한국에 선보이고 6.25이후 부산원예시험장 원장이던 우장춘 박사를 도와 서울 청량리 원예시험장 분원장으로 통역을 해드리고 식물육종분야에 조교로 평생 원예분야에 종사하셨던 분은 제 조부님(할아버님)이 아니라 제 부친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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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조부님(할아버님)은 일제시대 수원농림을 나오시고 만주국 문관시험을 거쳐 만주국 부흥부 미곡검사관을 지내시다 해방을 맞으신 이성구 선생님이십니다. 제 할아버님은 제가 대학 2학년때 작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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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버님은 일제시대 경성원예전문학교를 다니시다 해방과 함께 졸업하셔서 이왕직에서 일제에게 반환받은 창경궁 식물원을 맡아 초대 식물원장을 하시며 서구식 원예식물원을 국민들에게 선보이셨던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십니다. 6.25때는 꽃을 좋아하는 이승만 박사부부와 몰래 기차 4동을 달고 피난길에 올라 대전 대구 이리를 갈팡질팡하다 이승만 박사부부는 목포로 도망가고 제 부친은 창경궁 식물원의 식물들을 가지고 전주로 도망가셔서 전주임업시험장에 피난 식물원을 운영하셨고 그때 호구지책으로 전주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시며 그 식물들을 돌보셨습니다. 이후에 전주농림의 동료친구 선생님들이 전북대학교 농대 교수님들이 되어 제가 전북대학교 농대에 입학하게된 계기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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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가 중구난방하여 은 작가님이 정리하시는데 혼란을 드린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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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가 1980년 5월부터 10월까지 전주 35사단 헌병대에 수감되어 있기는 했습니다만 실제로 고문을 받던 장소는 전주 인후동에 있던 '인후공사'라는 간판을 단 보안대 건물 지하실이었습니다. 실제 헌병대 유치장 안에는 예비검속된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수감되어 오리걸음 철장타기등 다소의 가혹행위는 있었지만 폭력과 물고문 전기고문이 행하여진곳은 인후공사 보안대 건물 지하실이었습니다. 보안대 지프 차에 태워져 그곳과 35사단을 오가며 조사 진술서 작성등을 명분으로 가지가지 고문을 받았습니다. 풀려날때도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이 아니라 인후공사 정문에서 제 어머니에게 인계되었답니다. 이 부분도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저를 아는 사람들이 볼때는 제가 심하게 뻥을 치고 있는 걸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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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1일 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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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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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착]

은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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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포트에 담긴 식물은 양파 같은 둥그런 알뿌리위로 푸른 잎과 꽃대가 성큼 자라나서는 앙증맞은 꽃을 틔우고 있었다. 꽃은 엄지손톱보다도 작았다. 부화관을 가운데 두고 6장의 꽃잎이 받침처럼 퍼져있는 그 꽃은 화려하기 보다는 귀여웠고,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수선화에요. 내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을 본 여자가 말했다.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머리에 주황색 두건을 쓴 여자는 햇빛에 그을려 볼이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꽃이 예쁘죠? 흙이 묻은 흰목장갑을 낀 여자는 꽃을 바라보며 웃었다. 수선화가 이렇게 생겼던가? 생각해보니 수선화를 실물로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어디선가 봤을 텐데 그게 수선화인 줄 몰랐다. 이게 수선화였구나.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도시에서만 살았고, 그것도 마당이 콘크리트로 타설된 주택이나, 아파트에서만 살았다보니, 꽃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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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으로 산란하는 봄 햇살 속에서 수선화는 건강한 생명력으로 한 뼘 정도 자라 있었다. 낭창낭창한 플라스틱 모종 포트로는 더 이상 뿌리를 내리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다년생이니 내년에도 볼 수 있다고, 추위에도 강해서 기르기가 쉽다고, 망설이는 나를 보며 모종의 주인은 이야기했다. 수선화 말고도 다른 모종들도 많았다. 산세베리아, 문주란…… 종이컵보다 살짝 더 큰 플라스틱 포트에 심어진 그것들은 온 몸으로 햇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건 심었다기보다는 담겨있다고 해야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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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두고 그 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내 손 끝에 죽어나간 생물들을 생각하면 나는 선뜻 그 작은 꽃을 집어들 수 없었다. 집안에 생물을 들여 본 지가 언제인지 몰랐다. 살아있는 것들은 내 손에서 잘 크지를 못했다. 화분의 식물들은 물론이고,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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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으면 반대였지. 전자파에 좋다는 말에 망설이다 구매한 산세베리아는 양분 삼아 먹다 남은 우유를 화분에 뿌려주었다가 시름시름 말라 죽었고, 생후 한 달도 안 된 강아지는 손독이 올라 그만 죽고 말았다. 또 조카가 자신이 여행가는 사이에 잠깐 맡아달라고 놓고 간 금붕어는 시도때도 없이 먹이를 주는 바람에 과식으로 죽고 말았다. 그렇게 내 손에서 죽어간 생명들은 많았다. 살피꽃밭으로 마련한 집 화단은 죽어나간 것들의 공동묘지였다. 그것들을 자양분 삼아 키와 몸통을 늘려가던 측백나무들은 급기야 제 무게와 비좁은 공간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여름 태풍에 밑동째 꺾여 나가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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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생명 있는 것들을 내 안에 들이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척 지나치거나 그 왕성한 생명력에 감탄하며 대견해했을 뿐, 내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서로에게 그게 좋았다. 나는 상처를 받지 않았고, 그것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으므로.

“물만 잘 주면 돼요.”

물만 잘 주면 된다고? 여자의 말은 물을 너무 많이 줘 뿌리부터 썩어 들어간 행운목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죽어버린 그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힘들었다. 잘 키우고 싶었다. 그것들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밑동 굵게 자랐으면 했고, 강아지도 튼튼하게 자라서는 제 짝을 찾는 것을 보고 싶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 기대나 바람과는 달리 오래 살지 못했고, 진득이 내 곁에 머물지 않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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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온실에서 땅을 갈고 씨를 뿌리거나 갈무리해놓았던 알뿌리들의 싹을 틔어 들고 나온 여자는 망설이는 나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며 내 결정을 기다렸다. 사고 싶었다. 가까이 두고 옥수수 튀밥보다 작은 그 작은 노란 꽃을 보고 싶었다. 일을 하다 무심결에 고개 돌리면 그곳에서 노란 얼굴로 안녕, 하고 나를 위로하는 그 꽃을 보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는 십자가 밑에 그 꽃을 놓아두고 싶었다. 봄이에요. 한겨울 동토에서 웅크리고 있다 이렇게 예쁘게 피었네요. 죽음의 시간들을 딛고 이렇게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네요. 십자가의 기적을 닮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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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십자가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십자가도 위로가 필요했다. 나는 화분 2개 값을 지불했다.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하나는 벽에 걸린 십자가 밑, 콘솔에 두고 하나는 엄마의 방 화장대에 놓아둘 심산이었다. 여자는 내게 모종이 담긴 비닐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예쁘게 잘 보세요.”

키우세요, 가 아니라 잘 보세요,였다. 잘 키우라는 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손에 걸린 모종의 무게가 생각보다 가벼웠다.

“뭐냐?”

행여 꽃잎이 떨어질까봐 조심스럽게 비닐봉투에서 꽃을 꺼내놓는 나를 보며 궁금한 얼굴로 엄마가 물었다.

“꽃이에요.”

“무슨 꽃이냐?”

무슨 꽃이냐는 말속에는 꽃이름보다는 뜬금없이 웬 꽃이냐는 의미가 들어있었겠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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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의 방 화장대 한켠에 놓여있던 조화를 치우고 그 자리에 수선화 모종포트를 놓았다. 한 며칠 보다가 아파트 화단에 심어줄 요량이었다.

엄마의 시선이 조화를 따라왔다.

“그것은 뭐하게?”

“조화보다는 생화가 더 낫잖아요.”

“버리려고?”

엄마는 생급스럽게 따져 물었다.

“색이 바랬어요. 먼지도 앉고. 너무 오래됐잖아요.”

“그래도 버리지 마라.”

틀니를 낀 엄마의 입에서 나온 버리지 마라는 말이 웬지 서글펐다. 엄마는 그 조화에 당신을 투영시키고 있었다. 낡음과 쓸모없다는 존재. 엄마가 한 해 한 해 생기와 활기를 잃고 비쩍 마른 졸가리처럼 늙어갈 때, 조화역시 시나브로 색이 바래고, 먼지가 앉아서는 계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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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 조화를 사들고 왔을 때, 나 역시 똑같이 물었었다.

“뭐에요?”

“꽃이다.”

“무슨 꽃이에요?”

나는 그때 꽃이름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어디서 난 꽃인지, 갑자기 웬 꽃인지, 그게 더 궁금했다. 내 물음에 엄마는 무슨 꽃이라고 대답했을까. 아마 엄마는 나처럼 꽃이름대신 예쁘지,라고 되물었을 것이다. 빠듯한 살림형편에 엄마는 그 꽃을 사기 위해 꽤 갈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꽃을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에는 흐뭇함과 설렘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표정에 대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생화를 사지, 조화는 왜?”

“생화는 금방 시들고 말잖아. 돈이 아까워. 이건 시들지 않아서 좋다. 게다가 물을 갈아주어야 하는 성가신 일도 없고.”

“시들어야 꽃이죠. 향기도 없는 꽃이 뭐 예쁘다고. 그리고 집에 조화가 있으면 안좋대요.”

엄마는 내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그 꽃을 화병에 꽂았다. 그리고 한동안 가까이서 보기도 하고 뒷걸음질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도 하며 꽃의 위치를 바꾸었다. 철사에 푸른 테이프가 감겨있는 줄기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허리를 휘거나 모양을 잡고 바뀌었다. 장미, 양귀비, 백합, 모란…… 한 무더기 꽂혀있는 그 조화는 지나치게 원색적이고, 지나치게 싱싱하고, 지나치게 커서 방안의 다른 집기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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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화는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대로일 것이다. 색은 더 바래겠지만 꽃잎은 여전히 그대로인 채 현실과 기억의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정지된 시간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게 주어진 유한함은 이 꽃에는 없다. 하긴 언젠가 이 모형의 꽃들도 먼지로 변해 사라지겠지만 화무십일홍, 그 애달픈 절정의 시간들이 이 조화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 조화에 정이 가지 않았다.

엄마의 시선이 모종포트의 수선화보다는 내 손에 들려있는 조화를 따라다녔다.

“다른데 두었다가 꽃이 시들면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게요.”

버리지 않겠다는 말에 엄마의 얼굴에서 안도감이 돌더니 그제야 편하게 수선화를 바라보았다.

“무슨 꽃이냐?”

엄마가 다시 물었다.

“수선화에요.”

“뭐라고?”

“수선화요. 오다가 예쁘기에 사왔어요.”

나는 목청을 키워 대답했다.

“이쁘긴 이쁘다.”

오래전에 찾아온 당뇨성 질환으로 모든 것이 굴절되고 이지러져 보이는 엄마의 눈에도 앙증맞은 작은 꽃이 보이는 모양이다.

그 조화 말고도 우리 집에는 꽃이 있었다. 세상에 하나 뿐인 꽃. 그건 바로 엄마였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꽃이 되고 싶었고, 그런 삶을 살았다. 가난한 화가의 아내로 당장의 삶은 궁핍하고 힘들었지만 엄마는 여자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았다. 가닥 가닥 엮어 꽃송이처럼 부풀린 달비를 머리에 얹고 어디 한 곳 꺾인데 없이 빳빳하게 풀 먹인 동정이 달린 한복을 차려입고 밖에 나서면 사람들은 꽃을 보듯 엄마를 바라보곤 했다. 엄마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모아질 때마다 행복하고 달뜬 표정을 지었다. 가볍게 다물린 입가 어느 어름에는 자부심도 느껴졌고, 볼은 발그레 달아올랐다. 엄마도 알았다. 자신이 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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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갈보들이나 하는 짓을 살림하는 여자가 하고 다니다니. 제 여자에게 갈보라는 말을 들이댄 아버지가 놀라웠지만 아버지의 그 말속에는 질투와 분노와 경계와 단속이 들어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랬지만 엄마가 미색을 감춘 채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우고, 삯바느질로 집안 형편을 돕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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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엄마는 잘못 이식된 나무였다. 다른 곳에 이식되어 당신의 뜻대로 살았더라면 그 조화보다 더 화려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부잣집 막내딸로 자라나 부족함 없이 살던 엄마가 가난하디 가난한 농부의 장남에게 시집온 그 순간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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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손을 뻗어 수선화를 만져보았다. 푸른 힘줄이 비쳐 보이는 손으로 더듬는 그 손길이 조심스럽고도 찬찬했다. 절정을 지나는 꽃의 그 순간이 부러운 것인지, 아니면 잘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손의 감각으로 꽃을 읽고 싶어서인지, 꽃을 만지는 엄마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했다. 행여 꽃이 떨어지지 않을까, 잎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됐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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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막질환을 앓고 있는 어머니의 눈에 그 꽃이 어떤 형상으로 보일지 궁금했다. 일그러지고, 굴절되고 왜곡되어도 그 노란색만큼은 환하게 보일 것이다. 뭉개진 노랑으로, 덩어리진 노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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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하던 어머니의 방에 그 노랑꽃은 또 다른 실내등처럼 주변을 밝게 만들었다. 그래, 각기 다른 색들이 섞이면 또 다른 색으로 변하지만 노랑은 만들어낼 수 없다지. 빨강, 노랑, 파랑, 그 세 가지 색깔가운데서 가장 밝은 색이 노랑이라고 했다. 모든 빛이 섞이면 흰빛이 되지만 노랑은 어떤 것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가장 순결한 색이 노랑이다. 그 밝음과 순결함은 생존조건에서 유리할까, 아니면 독이 될까. 꽃들은 벌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더 밝고 강렬한 색을 택한다는데. 그렇다면 노랑은 생존조건에서 유리할 것이다. 그게 사람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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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모종 하나는 십자가 아래, 콘솔에 올렸다. 그곳에도 이미 엄마가 사놓은 크고 작은 조화들로 화려한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한여름 땡볕과, 한겨울 혹한과, 봄볕의 간지러움과, 가을의 스산한 기운들을 내부에 응집시켰다 어느 날 화르륵, 꽃으로 터져 나온 생명의 기운들이 아닌 모형의 꽃들로 이루어진 꽃밭은 생기가 돌지 않았다. 그 조화들 가운데서 생기를 지닌 모종포트의 수선화는 오히려 소박하고 수수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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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이 꽃의 학명이 나르키수스라던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연못에 빠져 죽었다는 미소년의 신화를 가진 꽃. 지중해, 그 따스한 곳에서 살던 꽃이 어쩌다 먼 이역, 이곳에까지 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을까. 그것도 모종포트 속에서. 초경도 치르지 않은 소녀 같은 모습의 꽃으로 다시 피어난 그 미소년의 신화는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을까. 뿌리를 내리려면 좀 더 생존이 용이한 곳에 내렸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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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화들을 치웠다. 그제야 노랑은 밝은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노랑꽃. 노랑…… 어쩌면 이 노란색에 먼저 끌렸을 것이다. 여자가 팔던 그 많은 모종의 꽃들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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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그 노랑이었다. 노란색만 보면 그가 떠올랐다. 물이 번지듯 그렇게. 잊고 살다가도, 아니 의도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해도 노랑만 보면 스위치를 켜듯 마음에 노랑물이 번지면서 그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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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 노란 장미. 그는 노란 장미였다. 그가 개설해놓은 블로그 이름이 노란 장미였고, 그 또한 황장, 노란 장미였다. 처음에 노란 장미라는 그 어감과 꽃이 주는 이미지가 어린왕자나 조르바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나는 그가 조르바나 어린왕자처럼 호기와 치기와 상상력이 가득한 인물일 거라고 예단했다. 하지만 프로필에 올라와 있는 빛바랜 사진속의 그는 어린왕자나 조르바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한손을 허리에 짚은 채 살짝 몸을 튼 자세로 렌즈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표정은 오히려 진지했고, 듬직했다. 그런데 왜 노란 장미일까. 호기심에 그의 블로그 속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도망치듯 빠져나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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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긴 그날에 멈추어있었다. 여전히 비명과 탄식과 신음과 총성이 가득했고, 증오와 분노가 깊은 개펄로 쌓여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그 안에 갇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한순간 무방비 상태로 대면해버린 그 비명들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그 노란 장미가 주던 매혹적인 상상은 금새 피투성이 현장으로 뒤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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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는, 왜, 집요하게 한 인간을 증오하고, 그날을 되새김질 할까. 나는 다시 그 블로그에 들어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블로그를 열어보는 것은 밀봉해두었던 내 부끄러움과 비겁함을 대면하는 일이었고, 그 참혹했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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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9일간의 일들. 그리고 기억들. 그 기억들은 내 내면에 깊은 어둠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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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랑카랑하면서도 절박하게 이어지던 여자의 호소를 나는 그 해 5월 27일 새벽에 들었었다. 밤과 새벽사이. 그들이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서 비장하게 결전을 다질 때 나는 나른한 잠 속에서 여자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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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집에서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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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지막 부탁이었고, 유언과도 같았다. 나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가 어둠의 도시를 깨울 때, 곧 죽음의 무도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나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다 덮으며 나의 안위를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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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에 완만한 포물선을 이루며 날아가던 총알의 궤적은 공터에서 터트리던 폭죽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날아가는 거리가 더 길었을 뿐. 펑펑. 적막한 밤하늘에 점점이 흩어지던 총알들은 멀리 바라보는 구경꾼의 입장에서는 꽁지불에 불을 밝히고 날던 반딧불이나 불티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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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그 찬란한 봄에. 생의 의지로 몸이 달던 그 시절에. 나의 20대의 시작은 그렇게 비겁하게 시작했다. 그 비겁한 시간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면 멀리, 아주 멀리 도망치고 싶었고, 숨고 싶었다. 이제까지 해온 대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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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를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끌고 간 건 노란 장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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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 방송사에서 그날 관련 특집방송으로 그를 취재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 프로그램에 작가 겸, 내레이션겸, 출연자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광주에서 집단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 인근도시에서 행해졌던 그들의 폭력을 고발하고, 감춰져 있던 첫 희생자를 알리며, 한 개인의 삶이 역사 앞에서 어떻게 망가지고 신음하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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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무장이 필요했다. 그가 들려줄 그때의 진실과, 그 시절의 내 비겁함을 대면한다는 건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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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You're gonna meet some gentle people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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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가려면 머리에 꽃을 꽂으라고 했던가. 나는 이 낭만적인 노래가사처럼 머리에 꽃을 꽂고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마음의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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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꽃을 꽂지는 않았지만 신사는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사는 동네에는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밑동 튼실하게 훌쩍 자란 키 큰 나무들에는 주먹만한 흰 꽃들이 만발해있었고, 관목과 옆으로 가지를 늘린 이름 모를 꽃나무들은 형형색색 절정의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생명의 축포였고, 송가였고, 환희였고, 열락이었다. 유난히 청명한 날씨에 꽃들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저 꽃이름은 무어에요? 저 꽃은요? 일일이 그 꽃들을 물어보지 못했다. 꽃들은 그저 꽃이었고, 그렇게 무리지어 봄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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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 때, 황사와 미세먼지로 하늘이 누렇거나 뿌연 한국의 하늘과는 달리 그가 사는 동네는 청명했고 햇빛은 투명했다. 그 햇빛 속에서 꽃과 사물들은 선명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은 사막이에요. 습도가 낮죠. 그러니 반사되거나 굴절되는 일 없어서 더 선명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가 말했다.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꼭 좋은 일일까. 살아가는데 있어서 낱낱이 치부가 드러나는 것과 적당히 그 부끄러움을 감추며 살아가는 것.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모르겠다. 감춘다고 해서 언제까지 감출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당장에 숨을 수는 있다.

“아, 이 머리.”

그가 쪽을 지듯 뒤로 묶은 꽁지머리를 만지며 환하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머리에 가있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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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는 머리를 길지 않으면 시큰거려서 못 견뎌요. 아직도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죠. 대체 무슨 꿈이냐고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한테도 다 말을 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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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측은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아내의 말에 장난처럼 귀신을 본다고 말했다. 깨진 뒤통수가 귀신들을 잡아내는데, 그 귀신들 안에는 그때 죽은 동급생도 있고, 선배도 있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장난처럼 말했지만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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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카메라 렌즈 앞에서 아내에게도 해주지 못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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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때 남쪽의 국립대학 농학계열 1학년생이었습니다. 1학년.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때죠. 서울에서 왜 그곳까지 왔냐구요?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다보면 길어질 테니, 그냥 집안사정 때문이라고 해두죠. 사실 그랬으니까요.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꿈이 많았지요. 헌데 운명은 저를 평범한 학생으로 살게끔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그곳으로 오기 전, 미군부대가 있던 용산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용산 미군부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친구들이 뉴스위크지나 타임지 같은 미국잡지를 가져다 줬지요. 그게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전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던 거지요. 친구들에게서 받은 미국발 잡지에는 놀라운 내용들이 들어있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는데, 실세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 사회는 철저한 통제와 검열의 사회로,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장막 뒤에 숨어 세상을 움직이는 세력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만 보고 들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발행된 그 잡지들을 통해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았습니다. 거기에는 1979년 12월 12일, 당시 육군소장이었던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킨 일과, 앞으로의 정권찬탈 계획을 비롯해 향후 한국의 정세를 예측하는 기사가 소상히 실려 있었습니다. 이때 노태우도 등장하는데, 그는 전두환과 쿠데타를 모의하고 당시 판문점을 지키는 9사단 병력을 빼서 서울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런 탓에 판문점은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는 무주공산 상태가 되었지요. 저는 이 사실을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을 모았습니다. 나와 같은 학년이었던 김차순 동기와 농대 1년 선배였던 이세종 선배가 저를 돕겠다고 나섰죠. 제가 미국잡지에 실린 기사들을 번역하고 우리는 그 번역한 기사를 가지고 학교 학생회관에서 등사했습니다. 등사지에 철판으로 번역한 기사를 쓰고, 등사판에 잉크를 붓고 롤러를 미는 방식이었지요. 그렇게 만든 유인물을 우리는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무섭지 않았냐구요? 당시는 무서움보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더 컸습니다. 젊은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우리가 찍어낸 유인물을 읽고 친구들은 물었죠. 전두환이 누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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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이었습니다. 80년 5월 17일 밤 자정의 일이었죠. 그러니까 날짜 변경선이 17일에서 막 18일로 바뀔 때였습니다. 그날도 이세종 선배와 저는 늘 하던 대로 유인물을 인쇄하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습니다. 그 밤에 말이죠. 모든 것이 고요하고 적막하게 가라앉을 시각에 말입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울리는 어지러운 발소리들과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 무언가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깨지는 소리들, 그 소리들이 뒤섞여 사방을 울렸죠. 순간 이세종 선배와 내 시선이 부딪쳤습니다. 뭐지? 무슨 소리지? 우리는 불안하게 눈으로 물었습니다. 불안은 이내 공포로 뒤바뀌었습니다. 도망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배와 나는 옥상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검은 베레모를 쓰고 M16총에 대검을 꽂은 채 학생회관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둘러댔습니다. 한번 맞으면 두개골이 바스러지는 죽음의 곤봉이죠. 우리는 얼마가지 못해 그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세종 선배는 제 눈앞에서 곤봉과 M16의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고는 쓰러졌습니다. 머리가 깨진 선배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죠.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곤봉과 무자비한 군홧발은 저에게도 퍼부어졌고, 전 다리 인대가 파열되고 피투성이가 된 채 포승줄에 묶여 군용무기차에 실려 어디론가 실려갔습니다. 군용무기차…… 그곳은 어두컴컴했고,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요. 마치 무덤 속 같았습니다. 그 부대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7공수 31년대 소속으로, 금마부대로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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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어땠냐구요?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들이 저를 배려해줬을까요? 먼저 이세종 선배의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그 선배가 5.18의 첫 희생자였습니다. 광주에서 희생자가 나오기 전, 이세종 선배가 죽었죠. 전북대의 난립과 이세종 선배의 죽음은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의 전주곡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야차들이었고, 두억시니들이었고, 악마였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지요. 눈앞에서 방금까지 눈을 마주치고 온기를 나누던 선배의 죽음은 내 생을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건 무척이나 두려운 일입니다. 제가 끌려간 곳은 전주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나를 협박하고 겁박하고 회유했습니다. 그들은 내게 종이 하나를 들이밀고는 적힌 그대로 외우고 자복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들이 작성한 조서였지요. 내용은 이랬습니다. 내가 김대중에게 50만원을 받고 학원소요를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일부러 전라도 소재의 학교에 위장입학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에 김대중에게 50만원을 받았다니요. 나는 한 번도 김대중을 만난 적이 없었고 당연히 돈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 이세종 선배의 죽음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강요했습니다. 아예 기억자체를 지우라고 협박했습니다. 꽁트였죠.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시키고,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라니요. 하지만 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제가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하고 본 것을 보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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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꽁지머리가 궁금하다 하셨던가요? 멋으로 기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주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에 끌려가 고문을 받을 때 일입니다. 그때 보안대의 고문담당 중사가 살려달라는 내 애원에 살려달라고 할 짓을 뭐하러 했냐며 5파운드 쇠파이프로 내 뒤통수를 내려쳤습니다. 그 순간 나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린 건 하루가 지난 뒤였습니다. 그들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내 몸 위로 거적때기를 덮어놓았더군요. 거적때기 안에서 정신을 차린 나는 그들이 내가 깨어난 것을 모르기만 바랄 뿐이었습니다. 쇠파이프로 맞은 곳이 너무 아프더군요. 너무 아파 차라리 죽었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목숨은 참으로 질기더군요. 그곳에는 아직도 흉터가 남아있습니다. 모든 흉터에는 역사와 사연이 있는 법이지요. 어떤 상처들은 아물면서 더 단단한 떡살로 굳어지지만 제 상처는 생의 허방처럼 짙은 어둠으로 남았습니다. 그 흉터는 아직도 한 번씩 지독한 통증으로 그날의 공포와 불안 속으로 저를 데려갑니다. 병원에 가서 씨티도 찍고 진찰도 받아봤지만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하더군요. 통증이 잠잠해지면 그곳이 늘 시립니다. 모자를 쓰지 않으면 시려서 견딜 수 없어요. 어느 날 부턴가 모자대신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모자를 쓰는 것보다 머리를 기르는 일이 훨씬 낫더군요. 삼손의 힘은 머리카락에서 나왔지만, 제 머리카락은 제 연약함을 가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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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부지하고 학교로 돌아왔지만, 제 시련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기와 선배들이 살아 돌아온 저를 배척하더군요. 학교에 이상한 소문들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프락치라며 수군거리고 경멸했습니다. 내 눈앞에서 죽어간 이세종 선배는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걸로 바뀌어 있더군요. 그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선배와 동기들은 저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나를 감시하던 보안사의 제 담당은 한 술 더 떠 저에게 운동권 학생들을 감시하고 그들의 동향을 보고하라며 끊임없이 회유하고, 협박했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군대생활을 집에서 오가며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고, 호주나 일본으로 유학도 보내준다고 했지요. 그들은 저에게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처럼 동기들을 밀고하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라고 저를 회유하고, 핍박했습니다. 전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전 보안대 녹화사업에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저를 입대시켰고, 토목공사라는 이름으로 저를 고문했지요. 그들은 참으로 집요하고, 질겼습니다.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도사견 같았지요. 거기서 또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때는 무릎의 연골이 깨졌지요. 얼마나 세게 때렸으면 한창 강건할 나이의 무릎과 연골이 깨지겠습니까. 무릎이 엉덩이만큼 부어올랐죠. 나는 국군통합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병원에 있을 때도 그들의 감시는 집요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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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대 유치장에서 죽음을 헤맬 때, 저를 구한 이가 예수였다면 이번에는 제 아내가 저를 구원했습니다. 그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는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통합병원에서 간호장교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전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죽음의 공포보다 더 큰 것이 사랑의 떨림이더군요. 사랑은 죽음의 공포도, 통증도 잊게 만들었습니다. 헌병대 유치장에서 만난 예수님이 아내를 보내셨을 겁니다. 그녀를 통해 삶을 꿈꾸라고. 정말 그녀를 보면서 저는 통증을 잊고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죽음을 목도하고 경험한 사람의 가슴에 그런 삶의 떨림이 깃들 수 있다니. 그건 기적입니다. 고통과 악몽으로 매일매일 죽고 싶었던 사람이 그 사랑으로 하루하루가 설레고, 살고 싶어졌으니까요. 삶이란 참 알 수 없습니다. 사랑만으로 살 수 없다고 하는데, 전 그 사랑으로 생명을 얻었어요. 아내로 인해 얻게 된 삶에 대한 의지가 저를 희망가운데로 인도했습니다. 제대할 때 그들은 협박하더군요. 토목공사에 대해 발설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퇴원할 때 의사가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더군요. 젊을 적에는 그래도 살이 있어 그럭저럭 걸을 수는 있겠지만 나이 들어 살이 빠지면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도 저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사랑이 제 목숨을 살렸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야차 같은 그들도 사랑을 알까요? 사랑이 있을까요? 그들에게도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랑은 어떤 빛깔이고, 어떤 형태이며, 어떤 종류일까요. 그들도 세상 천사 같은 낯빛으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내일을 설계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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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분이 아니었으면 오늘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죽는 게 차라리 낫다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포기했었으니까요. 만약 죽지 않았다면 지금쯤 온전히 제 정신으로 살지 못했을 겁니다. 그 트라우마, 그 충격, 그 분노는 제 삶을 불안하게 뒤흔들어 놓았을 겁니다. 그래요. 그분이 나를 구했습니다. 그분이 누구냐구요? 그 분은 바로 불쌍하고 초라한 예수입니다. 인류를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진 예수. 그분이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때, 헌병대로 잡혀간 나는 발가벗겨졌습니다. 수치스러웠지요.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 있는 데도 수치감은 어쩔 수 없더군요. 인간이란 그런 게 아닐까요? 수치심이 있어 인간의 고아함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요? 발가벗겨진 내 몸 위로 젖은 모포 한 장이 던져지더군요. 그리고 이내 나는 그 모포에 감싸여서는 무자비하게 맞아야 했습니다. 5파운드짜리 쇠파이프는 거침없이 제 몸 위로 퍼부어졌습니다. 머리고, 가슴이고, 옆구리고, 얼굴이고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쇠파이프는 나를 짓이기고 짓뭉갰죠. 한 번씩 내리칠 때마다 내 영혼과 정신과 생명은 균열을 일으키고, 그 사이로 생기가 뭉텅뭉텅 빠져나갔죠.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들에게 내 애원과 절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죽음을 맛보았고, 자신들이 마치 신이나 된 것처럼 굴었지요. 5월부터 10월까지, 그 6개월 동안 나는 철저히 망가지고 뭉개지고 짓밟혔습니다. 주님께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이 눈부신 날, 이 청춘의 시기에, 스무 살 문턱도 밟지 못하고 죽기는 너무 억울하지 않냐고 하나님께 울며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 기도에 침묵하셨습니다. 묵주기도도, 화살기도도 다 소용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예수님이 야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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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예수님이 내 눈앞에 나타나셨습니다. 헌데 전지전능하신 모습으로가 아니라 가장 힘없고 가련한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가시관을 쓰고 40킬로그램짜리 오크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장소로 끌려가는 예수님. 바로 그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채찍, 가죽끈을 꼬아 만든 플라그럼에는 납으로 만든 공이와 날카로운 소뼈가 끼워져 있지요. 한 번씩 내리칠 때마다 소뼈는 살점을 뜯어내고 납공이는 갈비뼈를 부러뜨립니다. 그 채찍으로 인정사정없이 맞은 예수님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곳곳이 갈라지고 찢겨지고 뜯겨져서는 벌건 속살이 드러나 있었고, 그 곳으로 피가 새나오고 있었지요. 어느 곳에는 벌겋게 벌어진 속살 사이로 흰 뼈도 보이더군요. 그래요. 그 분은 나보다 더 참혹하고 비참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그 가련한 예수를 향해 사람들은 침을 뱉고, 조롱과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살려달라고, 그만하라고 애원하지 않으셨지요. 묵묵히 당신에게 지워진 형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체념과는 다르지요. 그게 그 분의 소명이었으니까요. 예수님도 자기 민족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셨지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거지요. 저는 그 순간 생각했습니다. 그 분도 말없이 죽음의 형벌을 받아들이는데, 그런 예수님에게 내 목숨을 빌지 말자, 라고.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나를 극단으로 몰아놓던 고문의 통증과 두려움이 가시더니 담담해졌습니다. 그래, 죽자, 더 이상 망가지지 말고 죽자, 그렇게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당당해졌고, 평안해졌습니다, 살려달라고 빌던 내 입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일갈이 터져 나온 것도 그 순간이었습니다. 너희는 나 같은 동생이나 조카도 없냐!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고문과 폭행은 이어졌지만 강도는 줄었지요. 그때 예수님이 저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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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와서는 한동안 전 제 과거를 잊고 살았습니다. 의도적 망각이었죠. 그게 저를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헌데 육신을 이루는 세포하나하나에 각인된 기억들은 어쩔 수 없더군요. 문득 두고 온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1990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유난히 김치가 먹고 싶었습니다. 몸이 기억하고 몸이 원하는 것이지요. 먹는 것은 바로 육신을 구성하고, 정신을 만듭니다. 내 의지와는 달리 내 몸은 철저히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참을 수 없어 5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해 김치를 사러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곳에서 한인들이 살고 있던 노던 버지니아 동네까지는 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였죠.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곳까지 갈 엄두를 내겠습니까…… 그곳까지 쉼 없이 달려가는데, 어디선가 문득 김수희의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그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갑자기 명치 께가 묵지근하게 뜨거워지더니 왈칵,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울음이 쏟아졌지요. 엉엉. 통곡이었습니다. 왜 내가 여기 있지? 왜 내가 여기 있어야 할까. 왜 내 삶은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렇게 떠돌아다녀야만 할까. 그 모든 것이 서럽고, 억울했습니다. 김치 한 병을 사기 위해 5시간 동안 차를 운전해야 하는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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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말을 마치고는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당시의 격한 감정이 다시 찾아온 듯 그는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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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의 프레임 속에서 그를 지켜보던 카메라 감독은 카메라를 내리고 그의 감정이 잦아들길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그때도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은 유난히 청명한 파란색으로 빛났다. 그 파란색이 또 다른 슬픔의 빛깔로 내 기억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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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날, 그의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집 거실에 둘러앉았다. 어쩌면 모두에게 독한 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누구는 부채감과 부끄러움에서 도망치기 위해, 누구는 그 날의 악몽 같던 순간들을 잊기 위해 술이 필요했다. 우리는 서둘러 취기 속으로 도망쳤다. 그날, 그 밤은, 모두에게 애도의 시간이었고, 도피의 시간이었고, 황음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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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도나 되는 독주였다. 나 역시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그 독주를 마셨다. 대책 없이 쇠파이프 밑에서 뭉개지던 그의 상처를 위무하고 침묵하며 살아온 내 지난 시간들에 대해 속죄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으므로 더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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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간의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편집기 속에서 피가 묻어나는 그날에 대해, 고통스러운 그의 삶에 대해, 증언하고 있었다. 편집실, 그 좁은 사각의 밀폐공간 안에서 그는 블로그 속 세상과는 달리 그는 시종 침착하고, 젠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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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듯 미국으로 건너와 정신없이 사는 동안 아들이 태어났죠. 미국에서 자란 아들은 대한민국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비가 태어나고 제 조상들이 있는 그곳을 저는 아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애증의 나라여도 조국은 조국이니까요. 그래서 전 미국의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제 근본은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아들은 고맙게도 제 뜻을 좇아 고려대학교 국제학부로 편입해 짧게나마 한국생활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 친구들을 사귀고 한국을 알아갔죠. 그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고 기특하던지. 저와는 별개로 아들에게는 아들의 삶이 있고, 그런 까닭에 저와는 다른 대한민국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죠. 다행히 아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좋은 기억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2003년 저는 민주화 유공자로 지정되면서 어느 정도 제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만이 아닙니다. 가슴도 뜨거웠습니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뜨거움이었습니다. 이세종 선배가 떠오르더군요. 선배가 죽지 않았다면 이런 날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혼자 살아남아 그런 영예를 누리는 것이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고마웠습니다. 그래도 잊지 않았구나. 견디다보니 이런 날도 맞이하는구나, 내 고통과 상처가 무의미하지 않았구나 싶었죠. 나를 기억해준 대한민국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보상금도 주더군요. 저는 그 보상금을 흔쾌히 지인이 운영하는 장학재단에 기부했습니다. 저는 비록 조국을 떠났지만 훌륭한 인재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자랑스러운 나라로 이끌고 가길 바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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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한민국은 다시 저를 내쳤습니다. 내게서 민주화유공자 자격을 빼앗아갔습니다. 미국 시민이라 저에게 자격이 없다는 거지요. 한국국적이탈자. 그 말이 참 씁쓸하네요. 그저 살기 위해서, 숨을 쉬기 위해서 왔을 뿐인데, 그게 이유라니…… 전 도망쳐왔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언젠가 제가 돌아갈 곳이라고,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지요. 국적을 회복할 방법을 알아보니 우수인재복수국적인정 제도라는 것이 있더군요.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는 성과가 있는 사람은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제도였습니다. 나는 이곳에서의 지난 내 삶의 흔적들을 정리해 복수국적 인정 신청을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미국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미국환경부가 사용하는 표준코드를 개발하기도 했으니까요. 헌데 저는 우수인재가 아니라며 거절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제게 미국국적을 반납하고 다시 한국국적을 취득하라고 하더군요.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간 전 미국에서 공무원으로 살아왔습니다. 한국에서 살아온 시간보다 미국에서 산 시간이 더 많지요. 미국 국적을 반납하는 일은 그간의 제 삶을 부정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 시간을 무화시키는 일이지요. 게다가 연금마저 사라지고 맙니다. 연금…… 그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제 눈물이고, 한숨이고, 투쟁입니다. 편견과 차별과 맞서 싸우며 살아온 제 지난 시간의 퇴적물인 것입니다. 제 노후를 지탱해줄 버팀목이지요. 한국국적을 취득하게 되면 그것들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한국에서 도망치듯 이곳으로 건너와 치열하게 살아온 제 삶은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지요. 그렇게 말하고 보니 제 존재가 비눗방울 같군요. 미국연방고위공무원. 빛나 보이지만, 한없이 유약한 존재. 잘못하면 한순간 파팟, 사라지고 마는 존재…… 너겁…… 그래요. 어디 한군데 짱짱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너겁 같은 존재가 나네요……특별귀화라도 신청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전 조국으로부터 다시 버려졌습니다. 왜 대한민국은 저를 한 번도 아니고, 노년의 삶마저 거부하는 걸까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나름 노력한다고 했는데. 그게 잘못한 일일까요? 사람에게도 귀소본능이 있는데 제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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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괴감이 듭니다.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전문지식을 습득했고, 제 지식이 한국에 도움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기꺼이 나눌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살기 위해서 용을 쓰고 살아왔던 지난 제 생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만 같아 자괴감이 듭니다. 그렇게 내 조국 대한민국은 절 이방인 취급을 했습니다. 한번 쓰고 버리는, 아니 유다의 삶을 사는 것을 강요했고, 그 강요를 거절하면 핍박하고, 겁박하고, 협박했고, 종내는 버렸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은 어땠냐구요?. 동양인인 제가, 힘없는 동양의 나라에서 온 별 볼일 없는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여러분은 아마 짐작도 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렇게 조국은 저를 버렸는데도 왜 저는 대한민국이 그리울까요. 제가 좀 더 힘 있고 좋은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버림받은 저를 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부디 제 아들이 대한민국에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조국은 조국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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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의가 존재할까요? 제 삶을 그렇게 내놓았는데, 이세종 선배는 목숨을 바쳤는데, 제가 정의를 이야기하고, 그 날의 진실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지겨워합니다. 또야? 또 시작이야? 그만해. 제발 그만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지요. 그 피로 세상의 의를 이루시려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의와 선은 구현되었을까요? 이세종 선배가 목숨을 바쳤는데, 저 역시 피를 흘렸는데, 세상이 달라졌을까요? 제 삶은 이렇듯 송두리째 뽑히고 위태롭게 흔들리는데, 가해자는 아직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사과하면 받아줄 용의가 있는데, 그 사람은 끝내 우리를 조롱합니다. 용서의 성립은 가해자가 용서를 구했을 때만 성립이 됩니다. 그들이 언제쯤이나 진정으로 제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해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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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은 그가 던지는 물음과 한숨으로 끝을 맺었다. 그의 말처럼 사람들은 여전히 그날을 입에 올리면 지겨워했다. 진실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그날은 생기를 잃어갔고, 더러는 진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증언과 고백은 지역민들만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지역방송의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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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다시 만난 건 방송이 전파를 탄 뒤, 몇 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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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황급히 한국으로 들어온 그를 집 앞에서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단아하면서도 강건한 아내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정말 한국에서 내 뿌리가 뽑혀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계실 때는 언젠가 돌아와도 쉴 곳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는 뒷말을 마치지 못했고, 그런 그의 시선은 창밖 가로수를 향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뭄에 가로수는 제대로 잎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달려있는 잎도 끝이 말려들어가거나 누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을 깨고 싶어서 입을 열었다. 내 시선도 그의 시선이 있는 곳에 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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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화단의 나무들이 제대로 크지를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 죽어요. 잘 크나 싶으면 가지치기를 너무 심하게 해버리는 통에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어요. 그 모양이 마치 불구나 기형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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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차 싶었다. 그 때, 그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아파트 조경수들은 오래 살지 못해요. 지하주차장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화단이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요. 그러니 어느 정도 크면 더 크지 못하고 죽어버리지요.”

내 불평에 그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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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그였다. 배경에는 그의 할아버지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서구식 식물원을 선보인 사람이 그의 할아버지였고, 그 할아버지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와도 막역한 지기였다.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일찌감치 수목에 관한 지식들을 습득했고, 그 할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농학계열이 있던 남도의 학교로 진학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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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덧붙였다.

“올해처럼 가물 때 그래도 하수구 덮개가 있는 쪽의 나무들은 그런대로 생기가 돌죠. 덮개 밑으로 뿌리를 내린 탓에 조금이라도 물을 빨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은 나무들은 조금 가물다 싶으면 바짝 말라 들어가죠. 심을 때 뿌리를 동여맨 고무줄이라도 제거해주면 좋을 텐데 귀찮다고 그냥 심어버리는 것이 더 문제에요. 그러니 뿌리가 제대로 내릴 수 있겠어요? 인간의 이기심이 나무를 죽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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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가뭄으로 말라 들어가는 가로수가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차들이 씽씽 내달리는 도로변의 가로수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 것은 그 뒤부터였다. 그의 말마따나 가뭄이 들었을 때 그래도 푸른 잎을 매달고 있는 나무들은 하수구 덮개가 있는 쪽의 나무들이었다. 있는 힘껏 물기를 찾아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들을 볼 때마다 그 수고와 생의 의지가 안쓰럽기도 하고, 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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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시 나무였다. 뿌리째 뽑혀 이방의 땅에 이식된 한 그루 나무. 뿌리가 친친 묶여있는 나무. 하지만 빛을 찾아 가지를 뻗는 주광성의 식물처럼 그의 눈은 늘 한국을 향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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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초상을 마친 그는 다시 자신이 사는 동네로 돌아갔다. 나는 염탐하듯 그의 페이스북과 블로그의 글들을 읽으며 그의 근황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인간의 내면에 똬리를 튼 악은 그곳에도 만연해있었고, 그 편견과 차별이라는 괴물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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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집 마당으로 살기위해 찾아든 고양이를 돌봐주고, 그로인해 얻은 알러지를 치료하러 병원에 다니기도 했고, 행여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까봐 부지런히 한산 이씨, 그 선대를 좇아 그들의 정보들을 모으며 계보를 기록해나가고 있었다. 그 계보는 그대로 아들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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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환갑의 나이를 지난 그는 조금씩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지난 날의 짱짱하던 안광은 사라지고 대신 수굿하게 내려앉은 눈가 탓에 순한 인상마저 풍겼다. 세월은 그를 단련시키고 주저앉혔다. 고맙게도 그는 자신이 안전하게 서있을 곳을 찾아 더 깊게 뿌리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해자에 대한 원망보다, 저를 버린 조국에 대한 애증의 하소연보다는 남은 생을 잘 두량하기 위해 제가 서있는 땅에서 살길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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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센, 그 풍요의 땅에서 죽음을 맞이한 야곱은 그랬다지. 자신의 유해를 이방의 땅에 묻지 말고 간직하고 있다가 고향에 돌아가거든 그곳에 묻어달라고. 야곱의 부탁은 아들들에게 자신의 계보를 잊지 말라는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당부와 선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도 야곱의 심정일까. 제 뿌리를 확인하고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며 선조들을 확인하고 그들의 일생을 기록하고 차곡차곡 모아놓는 것. 어쩌면 그것은 그가 아들에게 줄 수 있는 생의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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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좀 더 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이 또한 이기심이겠지만 그가 잘 살아갈수록 내 안의 부채감이나, 비겁함의 농도도 그만큼 엷어질 수 있을 테니까.

3일 만에 수선화는 훌쩍 자라있었다.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튼실하게 하늘을 향해 키를 늘려야 하는데 종이컵 보다 살짝 큰 모종포트속의 수선화는 뿌리도 위태로워 보이고, 키를 늘린 꽃대와 잎도 어딘지 힘이 없어보였다. 벌써 잎들은 큰 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꺾이듯 처져내려 있었다. 다른 잎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힘을 주어 만지면 금방이라도 물크러질 듯 힘이 없어보였고, 연둣빛 속에 누르스름한 기운도 번지고 있었다. 어제 오늘, 물을 흠뻑 주고 햇빛을 좇아 베란다에 포트를 내놓았지만 그 햇빛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막 잎을 올리고 꽃을 피웠으니 어느 때 보다도 자양분이 필요할 것이다. 뉘볕이 아니라 쏟아지듯 내리는 푸짐하고도 눈부신 햇빛과 양분이 가득한 토양, 그 뿌리를 보듬어줄 대지와 바람도 필요할 것이다. 그것들은 간지럽게 꽃잎을 건드리고, 잎을 뒤흔들며 잠에서 깨울 것이다. 간혹 천둥번개도 치고, 폭우도 내리고, 서리도 내리고, 대지도 얼겠지만, 그것들은 수선화가 더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단련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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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 방의 모종포트를 들고 일어섰다.

“뭐하게?”

엄마의 시선이 수선화를 따라왔다.

“화단에다 심어주려구요.”

“사서 고생은 왜 해. 예전에 있던 꽃 제자리에 갖다 놓아라.”

“더 싱싱한 꽃으로 사드릴게요.”

“그냥 갖다놔. 애먼데 돈 쓰지 말고.”

엄마의 타박에 조화를 있던 자리에 갖다놓는데 그날이 문득 조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그는 그날의 피댓줄에 걸려있는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그날이 그 꽃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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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은 꽃들로 환했다. 목련, 벚꽃, 튤립…… 금빛으로 빛나는 봄햇살 속에서 꽃들은 형형색색, 저마다의 모습으로 피어나 다음 생을 기약하고 있었다. 사방에 퍼져있는 햇빛들이 꽃잎을 건드리고 땅을 더듬고 있었다. 그 간지러운 햇살의 애무에 땅속의 것들은 부지런히 기지개를 켜고, 짙은 갈색으로 얼어있던 땅에는 어느 새 푸른 이끼가 융단처럼 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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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처가 꽃이었다. 그 넘치는 생기와 활기로 세상이 부산스러웠다.

나는 땅을 팠다. 한겨울 동토는 파고든 햇살로 적당히 부풀어 올라있었고, 파는 대로 흙은 몸을 뒤집으며 제 속을 드러냈다. 그 작은 혈에 수선화를 심고 뿌리가 들뜨지 않게 흙을 발로 밟아 꾹꾹 눌러주고, 행여 아파트 제초작업에 다른 풀들과 함께 쓸려 나갈까봐 주변으로 마른 가지를 주워 와 울타리를 둘러주었다. 그리고 뿌리까지 적시게 물을 흠뻑 주었다. 지중해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와 뿌리를 내린 수선화가 살아남아 내년 봄에도 꽃을 틔울 수 있도록 나는 정성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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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수선화, 이 꽃처럼 그 날의 피댓줄에서 내려와 부디 굳건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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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접목한거나 옮겨 심은 식물이 제대로 붙거나 뿌리를 내려서 삶

2) 이 블로그는 실제 존재하는 블로그이며. 이 블로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작품화하였습니다. 인물도 실존인물이며 작품으로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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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제위께. 작가님께서 제 블로그에 있는 저에 대한 논픽션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집필하셨습니다. 제 블로그에 올려진 게시물의 분량이 방대하여 작가님이 블로그를 통해서 알거나 믿는 사실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지만, 작가님이 믿는 것과 실제와의 차이, 또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로 말미암아 그 내용이 사실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에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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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 실제와 차이나는 점을 몇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점은 작가님의 양해를 구하여 작품 말미에 첨부합니다. 또한, 작가님께서 차후에 작품집에 수록 할때 이 부분들을 바로 잡아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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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에서 제가 제 각시를 만난 때가 제 각시가 간호장교였을 때는 아니었습니다. 제 각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제 각시가 대구통합병원 옆에 있었던 간호사관학교 4학년 생도였을 때였습니다. 그 점이 중요한 것은 규정에 장교와 사병의 교제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여 간호장교들의 명예를 실추시킬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제각시를 만났을때는 사병환자와 간호사관학교 4학년 생도였을 때입니다. 또 만났던 장소는 대구통합병원내 성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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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각시가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간호장교가 되어 대구통합병원 옆에 있었던 국군간호사관학교를 떠나 수도통합병원에서 간호장교로 복무할때는 저는 퇴원하여 자대로 복귀하였을 때입니다. 실제로 제 각시와 사귀게 된 때는 제가 전역하여 민간인 신분일때 부터입니다. 즉 사병과 장교가 아닌 민간인과 간호장교의 사귐이었던 거지요.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제 각시에게 있어서 이점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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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방후 초대 창경궁 식물원장으로 서구식 식물원을 한국에 선보이고 6.25이후 부산원예시험장 원장이던 우장춘 박사를 도와 서울 청량리 원예시험장 분원장으로 통역을 해드리고 식물육종분야에 조교로 평생 원예분야에 종사하셨던 분은 제 조부님(할아버님)이 아니라 제 부친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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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조부님(할아버님)은 일제시대 수원농림을 나오시고 만주국 문관시험을 거쳐 만주국 부흥부 미곡검사관을 지내시다 해방을 맞으신 이성구 선생님이십니다. 제 할아버님은 제가 대학 2학년때 작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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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버님은 일제시대 경성원예전문학교를 다니시다 해방과 함께 졸업하셔서 이왕직에서 일제에게 반환받은 창경궁 식물원을 맡아 초대 식물원장을 하시며 서구식 원예식물원을 국민들에게 선보이셨던 방원 이성찬 선생님이십니다. 6.25때는 꽃을 좋아하는 이승만 박사부부와 몰래 기차 4동을 달고 피난길에 올라 대전 대구 이리를 갈팡질팡하다 이승만 박사부부는 목포로 도망가고 제 부친은 창경궁 식물원의 식물들을 가지고 전주로 도망가셔서 전주임업시험장에 피난 식물원을 운영하셨고 그때 호구지책으로 전주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치시며 그 식물들을 돌보셨습니다. 이후에 전주농림의 동료친구 선생님들이 전북대학교 농대 교수님들이 되어 제가 전북대학교 농대에 입학하게된 계기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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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가 중구난방하여 은 작가님이 정리하시는데 혼란을 드린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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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가 1980년 5월부터 10월까지 전주 35사단 헌병대에 수감되어 있기는 했습니다만 실제로 고문을 받던 장소는 전주 인후동에 있던 '인후공사'라는 간판을 단 보안대 건물 지하실이었습니다. 실제 헌병대 유치장 안에는 예비검속된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수감되어 오리걸음 철장타기등 다소의 가혹행위는 있었지만 폭력과 물고문 전기고문이 행하여진곳은 인후공사 보안대 건물 지하실이었습니다. 보안대 지프 차에 태워져 그곳과 35사단을 오가며 조사 진술서 작성등을 명분으로 가지가지 고문을 받았습니다. 풀려날때도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이 아니라 인후공사 정문에서 제 어머니에게 인계되었답니다. 이 부분도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저를 아는 사람들이 볼때는 제가 심하게 뻥을 치고 있는 걸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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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1일 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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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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