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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 The Part and The Whole by Werner Heisenberg 1969

이야기

by 黃薔 2024. 3. 21.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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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EQvCXtfHEM

 

054.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 The Part and The Whole by Werner Heisenberg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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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이자 20세기 초에 양자역학이 탄생하는데 일조한 핵심 물리학자 중 한명입니다. 그는 1925년에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쓴 후속 논문에서는 양자역학의 행렬역학이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그는 1927년에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31살의 나이로 1932년 "양자역학의 창안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그가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더불어 물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 명칭은 대강 알 정도로 유명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å 난류의 유체동역학 이론, 원자핵, 강자성, 우주선, 그리고 아원자 입자에 중요한 공헌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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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우란프로젝트의 총책임자로 참여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1957년 뮌헨의 연구용 원자로와 함께 카를스루에에 최초의 원자로를 계획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부분과 전체(The Part and The Whole)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지인들이 여러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고, 과학 외적으로 하이젠베르크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많이 기술되어 있는 수준이 높고 내용이 어려운 자서전이기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생애와 부분과 전체의 내용이 혼재되어 설명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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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생애 – Life of Werner Heis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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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칼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2.5-1976.2.1)는 1901년 12월 5일에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카스파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하이젠베르크와 애니 베클레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고전 언어의 중등학교 교사출신으로 대학 시스템에서 중세와 현대 그리스어 연구에 대한 독일의 유일한 교수가 된 분입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루터교 기독교인으로 자랐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십대 후반에 바이에른 알프스에서 하이킹을 하면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뮌헨, 괴팅겐 및 코펜하겐에서 과학 교육을 받는 동안 동료 학생 및 교사와 원자 이해에 대한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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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는 1918년 수립된 바이에른 공화국 평의회와 싸우기 위해 1919년 자유군단의 일원으로 뮌헨에서 활동했습니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4년 동안 뮌헨-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이론물리학자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빌헬름 빈에게, 게오르그-아우구스트 괴팅겐 대학교에서 막스 보른과 제임스 프랑크에게 물리학과 수학을 그리고 다비트 힐베르트에게 수학을 배웠으며 이때 뮌헨 대학교에서 한 살 위인 볼프강 파울리를 만나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1922년 6월 조머팰트는 하이젠베르크를 괴팅겐으로 기찻값까지 대주며 데려가 '닐스 보어의 원자 물리학 세미나'에 참가시켰는데, 조머펠트는 하이젠베르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닐스 보어의 원자 물리학이론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흥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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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행사에서 보어는 객원 강사였고 양자 원자 물리학에 대한 일련의 포괄적인 강의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보어를 처음으로 만나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보어는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보어는 세미나가 끝난 후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산책을 하면서 하이젠베르크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고, 나중에 자기와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입학한 지 2년이 채 못 되는 대학생이었지만,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위대한 학자 보어의 눈에 든 것입니다.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세미나 장소에서 자신의 물건이 모두 들어있는 가방을 도둑맞아서 돌아온 후에 알바를 하며 한참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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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 뮌헨에서 조머펠트 밑에서 박사 학위를 획득했습니다. 조머펠트가 제안한 주제인 하이젠베르크의 박사학위 논문은 난류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논문은 층류의 안정성 과 난류의 성질 둘다를 논의했습니다. 안정성 문제는 층류로부터의 작은 교란을 위하여 4차 선형 미분방정식인 오르-조머팰트 방정식을 사용하여 연구되었습니다. 괴팅겐에서, 막스 보른 밑에서,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에 변칙적인 제이만 효과에 대한 하빌리타치온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괴팅겐의 막스 보른 밑에서 조교강사로 일했습니다. 중간에 1924년 9월 17일부터 1925년 5월 1일까지, 국제 교육 위원회 록펠러 재단 연구비로,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연구소 소장인 닐스 보어 밑으로 연구하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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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9월 그의 세미나 논문인 “운동학과 역학 관계의 양자 이론적인 재해석”이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괴팅겐으로 돌아와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약 6개월에 걸쳐 양자역학의 행렬 역학을 개발했습니다. 1926년 5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에서 대학 강사와 닐스 보어의 조교가 되었습니다. 1927년 코펜하겐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연구하면서 불확정성 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2월 23일, 하이젠베르크는 동료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에게 편지를 써서 처음으로 그의 새로운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 원리에 관한 논문에서, 불확정성이 아닌 "부정확성 (온게나이이치카이트 Ungenauigkei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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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27년부터 1942년까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교수이자 물리학부의 학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28년 2월 1일 그곳에서 취임 강의를 했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출판된 그의 첫 번째 논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강자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파울리 배타 원리를 이용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그와 함께 공부하고 연구했던 박사과정 학생들과 대학원생 맟 연구 동료들인 에리히 바게, 펠릭스 블로흐, 우고 파노, 지그프리드 플뤼게, 윌리엄 버밀리언 휴스턴, 프리드리히 훈트, 로버트 멀리컨, 루돌프 파이얼스, 조지 플라제크,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 프리츠 자우터, 존 C. 슬레이터, 에드워드 텔러, 존 해즈브룩 밴블렉, 빅토어 바이스코프,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그레고르 벤첼, 그리고 클라렌스 제너 등 그들의 높은 자질은 후에 찬사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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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초, 하이젠베르크와 파울리는 상대론적 양자장론의 기초를 닦는 두 논문 중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또한 1929년에 하이젠르크는 중국, 일본, 인도, 미국을 순회 강연했습니다. 1929년 봄, 그는 시카고 대학교의 객원강사로, 거기서 양자역학을 강의했습니다. 1928년,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폴 디랙이 양자역학의 상대론적 파동 방정식을 도출했는데, 이것은 양극의 전자의 존재를 암시했고, 나중에 양전자로 명명되었습니다. 1932년, 우주선의 안개 상자 사진을 통해, 미국의 물리학자 칼 데이비드 앤더슨은 양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자취(track)임을 확인했습니다. 1933년 중반, 하이젠베르크는 양전자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디랙의 이론과 그 이론의 추가 전개에 대한 그의 생각은 두 개의 논문에 제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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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인 “양전자에 관한 디랙의 이론에 관한 언급”은 1934년에, 두 번째인 “양전자에 관한 디랙 이론의 결과”는 1936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디랙 방정식을 비-교환자를 포함하는 양자화 조건에 따라 스핀 ħ/2의 모든 점 입자에 대해서 "고전적" 장 방정식으로 재해석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와같이 하이젠베르크는 그것을 전자들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양자) 장 방정식으로 재해석하여, 물질을 입자 생성과 파괴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상대론적 양자 장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전자기학과 같은 기초 위에 놓았습니다. 헤르만 바일은 이미 1929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을 기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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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 역학과 노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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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양자역학 확립에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중요한 업적으로는 그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가 있습니다. 또, 양자역학의 기술 방법인 '행렬역학'을 고안해 냈는데 이 업적으로 1932년 겨우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양자역학을 확립한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은 물리학자와 역사가들에게는 수수께끼였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엄청난 행열을 만들어내고도 그게 수학에서 말하는 '행렬'이라는 걸 잘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7월 9일, 하이젠베르크는 수학자 출신 물리학자 막스 보른에게 이 논문을 검토를 위해 주었습니다. 보른이 그 논문을 읽었을 때, 보른은 공식이 그가 브레슬라우 대학교의 수학자 야콥 로자네스(Jakob Rosanes)에게 배운 행렬의 체계적인 언어로 옮겨지고 확장될 수 있는 공식임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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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른은 그의 조수이자 전 학생이었던 파스쿠알 요르단의 도움으로 즉시 전사 및 전개을 시작했고 출판을 위해서 결과를 제출했는데; 이 논문은 하이젠배르크의 논문이 발표된 지 60일 만에 접수되어 출판하게 됩니다. 이때까지 물리학자들은 행렬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순수수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구스타프 미에(Gustav Mie)는 1912년 전기역학에 관한 논문에서 그것들을 사용했고 보른은 1921년 결정의 격자 이론에 관한 연구에서 그것들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행렬이 사용되었지만, 행렬의 곱셈이 있는 행렬의 대수학은 양자 역학의 행렬 공식화에서 같은 묘사(picture)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1928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을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지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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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노벨 물리학상 발표는 그해 11월로 연기되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 그중에서도(inter alia), 수소의 동소체(allotropic) 형태의 발견으로 인도한 그 적용의 양자역학의 창안으로" 1932년 수상자로 발표된 것은 그 때였습니다. 행렬역학이 수학적 엄밀성을 갖추게 된 데에는 막스 보른의 역할이 컸지만, 하이젠베르크만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어 막스 보른은 이를 무척이나 아쉬워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 그도 다른 업적으로 노벨상을 수상합니다. 나중에 폴 디랙에 의해 행렬역학은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이 밝혀집니다. 똑같은 현상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기술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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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원자핵이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는 이론도 하이젠베르크가 주창했고, 다체문제나 강자성 연구 등 중요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실험에서는 빵점짜리 과학자였습니다. 실제로 이 때문에 박사 학위를 받지 못할 뻔했습니다. 박사학위 자격 구두 시험에서 감독관이었던 흑체복사에서의 변위 법칙 발견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한 실험물리학자 빌헬름 빈(Wilhelm Wien)이 모두 실험물리 문제를 내는 바람에 한 문제도 대답하지 못했고, 같이 감독관으로 있던 이론물리학자 아르놀트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가 하이젠베르크가 대단한 천재라고 바득바득 우겨서 겨우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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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빈은 조머펠트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하이젠베르크의 박사 학위 자격을 인정했지만, “대체 이론물리학 하는 놈들은 뭘 하는 놈들이길래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가 매년 한 명 이상씩 나오는 거지?”라는 비꼬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과 31세에 노벨상을 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대단한 천재가 맞기는 맞는 모양입니다. 이러한 조머펠트는 하이젠베르크의 학부 시절 지도교수이기도 했는데,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재능을 일찍 눈치채고 신입생 시절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시켰으며, 보어나 아인슈타인과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조머펠트의 문하에서는 후일 노벨상 수상자가 7명이나 배출되는 등 뛰어난 인재가 모이는 곳이었고 하이젠베르크는 나중에 '조머펠트에게 물리학에 대한 희망을 배웠다'는 말을 남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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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수학과 물리학 사이에서 고민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원주율이 초월수임을 증명한 것으로 유명한 수학 교수 린데만을 찾아가 본인이 독학으로 바일의 저서인 '공간 시간 물질'을 공부했다고 말했으나, 린데만은 비꼬는 말투로 “그 책을 다 공부할 정도면 수학을 더 공부할 필요가 없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대답은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데, 우선 그 정도 어려운 책을 학부초년생인 하이젠베르크가 독학으로 마쳤다는 말에 불신의 의미로 비꼬는 대답을 한 것일 수도 있고, 바일의 책이 순수수학이 아닌 수리물리학 서적이었기 때문에 그 책을 흥미롭게 읽었다면 수학이 아닌 물리학으로 관심이 쏠린 것이니 수학을 전공해봤자 소용 없을 거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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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린데만 자신은 순수 수학자였으므로 하이젠베르크의 말에 반감을 가져서 비뚤어진 대답을 했을 수도 있는데, 애초에 하이젠베르크가 린데만을 방문한 목적이 대학원생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린데만의 세미나에 학부생인 자신도 참석하게 해달라고 주제 넘는 부탁을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조머펠트는 바일의 저서를 공부했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대답에 그 정도면 필요한 매우 높은 수준의 수학적 능력을 성취한 것이라고 인정해주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에 상세하게 나옵니다. 20세기 초에 워낙 쟁쟁한 물리학자들이 많아 조머펠트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하지만 그도 절대 무시 못할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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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젊은 학생들의 선생으로서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조머펠트가 이 점에서 '경탄할 만하고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학생을 지도한 스승으로서 유명한 경우는, 수학자인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가 유명합니다.  한편 아인슈타인과의 만남은 그 후 몇 년 뒤에 이루어졌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때의 토론에서 훗날 자신에게 노벨상을 안겨줄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를 얻는데 이는 이론이 무엇을 실험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에 자세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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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SS)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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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한 직후, 하이젠베르크는 핵의 중성자-양성자 모형에 대한 세 개의 논문중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후 하이젠베르크는 언론에서 "백인 유대인"이라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도이체 물리학(Deutsche Physik) 또는 독일 물리학 또는 아리안 물리학(Aryan Physics)의 지지자들은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한 주요 이론 물리학자들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 초반부터 반유대주의 및 반이론물리학 운동인 도이체 물리학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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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환경에서 적용되었듯이, 가장 두드러진 두 지지자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필리프 레나르트와 요하네스 슈타르크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요인이 학문적 능력보다 우선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를 많은 독일 대학의 교수로 임명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아르놀트 조머펠트의 후계자로 임명받으려는 그의 시도는 도이체 물리학 운동의 반대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1935년 4월 1일,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박사학위 고문인 저명한 이론 물리학자 조머펠트는 명예교수(emeritus) 지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렇지만, 조머펠트는 1939년 12월 1일까지 걸린 후임자 선출 과정 동안 그의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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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교수단의 선택과 독일 교육부와 도이체 물리학의 지지자들 사이의 학문적, 정치적 차이로 인해서 그 과정은 오래 걸렸습니다. 1935년 뮌헨 교수단 이론물리학의 일반 교수이자 뮌헨 대학의 이론물리학 연구소 소장인 조머펠트를 대신할 후보자 목록을 작성했습니다. 세 명의 후보자는 모두 조머펠트의 이전 학생이었는데: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하이젠베르크; 1936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피터 디바이; 그리고 리처드 베커Richard Becker였습니다. 뮌헨 교수단은 이 후보자들을 확고하게 지원했으며 하이젠베르크가 첫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이체 물리학의 지지자들과 교육부(REM)의 요원들은 그들만의 후보자 목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싸움은 4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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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하이젠베르크는 도이체 물리학의 지지자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한 공격은 하인리히 힘러가 이끄는 친위대(SS)의 신문인 “검은 군단(The Black Corps)”에 실렸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는 "사라져야" 마땅한 "백인 유대인" 즉, 유태인처럼 행동하는 아리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유대인들이 폭력적인 공격을 받고 투옥됨에 따라서 이러한 공격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문제를 해결하고 명예를 되찾기 위해 한 사설과 힘러에게 보내는 편지로 반격했습니다. 어느 날, 하이젠베르크의 어머니는 힘러의 어머니를 방문했습니다. 두 여성은 하이젠베르크의 외할아버지와 힘러의 아버지가 바이에른 하이킹 클럽의 목사이자 회원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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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힘러는 1938년 7월 21일 친위대 집단지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하이젠베르크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내서 하이젠베르크 사건을 진정시켰습니다. 하이드리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힘러는 하이젠베르크가 한 세대의 과학자들을 가르치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독일은 그를 잃거나 침묵시킬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힘러는 하이젠베르크에게 이 편지가 가족의 추천으로 보내졌다며 하이젠베르크에게 전문적인 물리학 연구 결과와 관련 과학자들의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태도를 구별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가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조머펠트의 자리를 꿰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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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뮐러는 이론물리학자도 아니었고, 물리학 저널에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독일 물리학회 회원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임명은 조롱거리로 여겨졌고 이론물리학자들을 교육하는데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친위대(SS) 수사를 이끈 세 명의 조사관은 물리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하이젠베르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그들 중 한 명의 박사 시험에 참여했었습니다. 세 명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요하네스 줄프스(Johannes Juilfs)였습니다. 그들은 하이젠베르크뿐만 아니라 이론물리학 및 학계에서 '도이체 물리학' 운동의 이념 정책에 반대하는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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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중반, 하이젠베르크는 두 개의 논문에서 우주선의 샤워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4편의 논문이 더 나왔습니다. 1938년 12월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자연과학(The Science of Nature)’에 우라늄에 중성자들로 충돌시킨(bombarding) 후에 바륨 원소를 검출했고 오토 한은 우라늄의 '폭발(bursting)'로 결론짓는 원고를 보냈고; 동시에 그해 7월에 네덜란드로 피신하여 그후 스웨덴으로 간 친구 리제 마이트너에게 이 결과들을 알렸습니다. 마이트너와 조카 오토 로버트 프리쉬(Otto Robert Frisch)는 한과 슈트라스만의 결과를 핵분열로 올바르게 해석했습니다. 프리쉬는 1939년 1월 13일 실험적으로 이것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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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6월과 7월에 하이젠베르크는 앤아버에 있는 미시간 대학교에서 사무엘 구드스미트(Samuel Goudsmit)를 방문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여행했습니다. 그렇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미국으로 이주하는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6년 후 구드스미트가 제2차 세계대전 끝무렵에 알소스 작전(Alsos Mission)의 수석 과학 조언자가 될 때까지 그를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클래식 음악을 즐겼고 피아노 연주 실력이 수준급이어서 그의 부인도 피아노 연주로 꼬셨습니다. 1937년 1월, 하이젠베르크는 개인 음악 발표회에서 엘리자베스 슈마허(Elisabeth Schumacher, 1914–1998)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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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는 유명한 베를린 경제학 교수의 딸이었고, 그녀의 오빠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인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였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1937년 4월 29일 엘리자베스 슈마허와 결혼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상당한 수준의 철학 교육도 받았습니다. 이 때문인지 양자역학의 철학적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실 당시 유럽 출신의 다른 많은 물리학자들도 마찬가지였지만,때때로 하이젠베르크를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소개하는 인명 사전도 있을 정도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나중에 자신의 스승들에 대해서 '조머펠트에게는 물리학에 대한 희망을, 보른에게는 수학을, 보어에게는 철학을 배웠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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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핵무기 프로그램 - 우란베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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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오펜하이머가 주도하여 극비리에 영국과 캐나다도 참여한 핵개발 계획이 맨해튼 계획이라면, 나치 독일이 추진한 핵개발이 바로 우란베라인(Uranverein)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우란베라인 프로젝트는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 구성되어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보다 일찍 시작했습니다. '육군 병기청(Heereswaffenamt, HWA)'은 '제국 교육부 (Reichserziehungsministerium, REM)'에서 '제국 연구위원회 (Reichsforschungsrat, RFR)'를 만들어서 군사 후원 하에 공식적인 독일 원자력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1939년 9월 16일 첫 회의를 가졌습니다. 이번 회의는 쿠르트 디브너(Kurt Diebner) 육군 병기청(HWA) 고문이 주관하고 베를린에서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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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인으로는 발터 보테, 지크프리트 플뤼게 (Siegfried Flügge), 한스 가이거, 오토 한, 폴 하텍(Paul Harteck), 게르하르트 호프만(Gerhard Hoffmann), 요제프 마타우치(Josef Mattauch), 게오르그 슈테터(Georg Stetter)가 포함되었습니다. 곧이어 하이젠베르크, 클라우스 클라우시우스(Klaus Clusius), 로베르트되펠(Robert Döpel),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등이 두 번째 회의를 열었습니다. 베를린-달렘(Dahlem)에 위치한 카이저-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WIP)는 다이브너가 관리소장이 되어 육군 병기청 (HWA)의 권한에 속하게 되었고, 핵 연구에 대한 군사 통제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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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브너가 육군 병기청(HWA) 프로그램 하에서 카이저-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WIP)를 관리하던 시기에, 디브너와 카를 비츠(Karl Wirtz)와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를 포함한 하이젠베르크의 내부 서클 사이에 상당한 개인적, 직업적 적대감이 발전하였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 발견 등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아 우란프로옉트의 중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1942년 2월 26~28일 카이저-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WIP)에서 열린 육군 병기청(HWA)이 소집한 과학 회의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제국 관리들에게 핵분열을 통한 에너지 획득에 관한 강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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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늄 핵분열로부터 에너지 생성을 위한 이론적 토대(Die theoretischen Grundlagen für die Energiegewinning aus der Uranspaltung)”라는 제목의 이 강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하이젠베르크가 사무엘 구드스미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제국 장관의 지적 수준에 맞추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핵분열의 엄청난 에너지 잠재력에 대해 강의하면서 원자핵의 분열을 통해 2억 5천만 전자볼트가 방출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연쇄 반응을 달성하기 위해 순수한 우라늄235가 필요하며, 자연계에서 이를 정제하여 농축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우며,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동위원소 235 92U를 순수한 형태로 얻는 우라늄 농축과 기계 속에서 일반 우라늄과 감속재의 대체 적층 방법 및 포함한 다양한 방법을 탐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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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기계가 차량, 선박 및 잠수함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실용적인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러한 과학적 노력에 대한 육군 병기청(HWA)의 재정적, 물질적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두 번째 과학 회의가 이어져서, 국방과 경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현대물리학의 문제들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회의에는 베른하르트 루스트 제국 과학교육문화부 장관이 참석했습니다. 회의에서 루스트 장관은 카이저 빌헬름 협회에서 핵개발 계획을 철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신 제국 연구위원회가 그 프로젝트를 맡기로 되었습니다. 1942년 4월, 육군은 물리학 연구소를 카이저-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WIP)에 반환하고, 하이젠베르크를 연구소장으로 임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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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IP에서 이 직책을 맡으면서 하이젠베르크는 첫 번째 교수직을 얻었습니다. 피터 디바이는 여전히 연구소의 소장이었지만, 육군 병기청(HWA)이 KWIP의 관리권을 장악했을 때 독일 시민이 되는 것을 거부한 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아직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로베르트되펠(Robert Döpel)과 그의 아내 클라라 되펠(Klara Döpel)에 의해 우란베라인을 위한 연구를 수행해온 그의 물리학과를 맞고 있었습니다. 1942년 6월 4일,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군부수 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우란베라인 연구를 핵무기 개발로 전환할 가능성에 대해 보고하도록 소환되었습니다. 회의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슈페어에게 상당한 자금력과 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1945년 이전에는 폭탄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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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베라인 프로젝트는 제국 연구회의 지도 하에 배치된 후 원자력 생산에 중점을 두어 '전쟁의 중요성 (kriegswichtig)' 지위를 유지했고; 따라서 출자는 군대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원자력 프로젝트는 우라늄 및 중수 생산,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및 원자로(Uranmaschine 우라늄 기계)의 주요 영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 후 프로젝트는 본질적으로 여러 연구소로 나뉘었고, 이 곳에서는 감독이 연구를 주도하고 자신의 연구 의제를 설정했습니다. 군대가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통제를 포기한 1942년의 시점은 인원수로는 프로젝트의 절정이었습니다. 약 70명의 과학자가 이 프로그램을 위해 일했으며 약 40명의 과학자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핵분열 연구에 할애했습니다. 1942년 이후, 응용 핵분열을 연구하는 과학자의 수는 극적으로 감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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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연구소와 함께 일하지 않는 많은 과학자들은 핵분열 연구를 중단하고 보다 시급한 전쟁 관련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42년 9월, 하이젠베르크는 가본 입자 물리학의 산란 행렬 또는 S-행렬에 대한 3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처음 두 개의 논문은 1943년에 출판되었고, 세 번째 논문은 1944년에 출판되었습니다. S-행렬은1925년에 관찰 가능한 것들만을 사용하여 양자역학의 행렬 공식화의 기초가 된 것으로 판명된 것과 같은 선례였습니다. 1943년 2월, 하이젠베르크는 프리드리히-빌헬름스-대학교(현재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의 이론물리학과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4월에는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맴버로 선출되었습니다. 같은 달, 그는 베를린에서 연합군의 폭격이 증가함에 따라 가족을 우르패트(Urfeld)에 있는 은신처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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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그는 같은 이유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첫 번째 직원을 헤칭겐(Hechingen) 과 슈바르츠발트 가장자리에 있는 그 이웃 마을인 하이겔로흐(Haigerloch)로 파견했습니다. 의도적으로 핵개발을 사보타주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하이젠베르크의 책 “부분과 전체”를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는데, 애매한 중언부언이 많고 본인이 원자로 필요성도 인식못한 실험물리학의 무지로 다 그대로 신뢰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나치에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나치 당원 대학생에게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비판하거나, 유대인에 동정적이고 아들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독일 과학자인 막스 플랑크에게 어떻게 하면 히틀러를 막을 수 있는지 자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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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른 동료 과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진지하게 이민을 고민했다고 서술했습니다. 1944년 1월 24일부터 2월 4일까지 하이젠베르크는 독일군이 보어의 이론물리학 연구소를 몰수한 후 점령된 코펜하겐으로 여행했습니다. 그는 4월에 짧은 귀국 여행을 했습니다. 12월에 하이젠베르크는 중립국 스위스에서 강의했습니다. 미국 전략사무국은 모 버그 (Moe Berg)요원을 보내 권총을 갖고 강의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강의에서 독일이 원자폭탄 완성에 가까워졌다는 내용이 나오면 하이젠베르크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1945년 1월, 하이젠베르크는 나머지 직원 대부분과 함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슈바르트발트 내의 시설로 이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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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알소스 작전(Alsos Mission) - 엡실론 작전(Operation Epsi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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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소스 작전(Alsos Mission)은 독일이 원자폭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독일의 원자 관련 시설, 연구, 물자, 과학 인력을 이용하려는 연합군의 노력이었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일반적으로 연합군의 통제 하에 있던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때로는 여전히 독일군의 통제 하에 있는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베를린은 많은 독일 과학 연구 시설의 위치였습니다. 사상자와 장비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전쟁 말기에 이 시설들 중 다수는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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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WIP)는 1943년과 1944년에 대부분 슈바르츠발트 끝자락에 있는 헤칭겐과 그 인근 마을인 하이겔로흐로 옮겨졌고, 결국 프랑스 점령 지역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알소스 작전의 미국 특수부대는 핵 연구와 관련된 많은 독일 과학자들을 구금할 수 있었습니다. 3월 30일, 알소스 임무단은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여 발터 보테, 리하르트 쿤, 필리프 레나르트, 볼프강 거트너를 포함한 중요한 과학자들을 체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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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결과 오토 한은 테일핑겐에 있는 그의 실험실에 있었고,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폰 라우에는 헤칭겐의 하이젠베르크의 실험실에 있었으며, 하이젠베르크 팀이 베를린에 건설한 천연 우라늄 원자로는 하이겔로흐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알소스 임무의 주요 초점은 뷔르템베르크 지역의 핵 시설에 있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1945년 5월 3일 우르펠트에서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는 영토에서 산악 작전을 벌이다 붙잡혀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로 옮겨져 1939년 앤아버 방문 이후 처음으로 5월 5일 구드스미트를 만났습니다. 독일은 이틀 만에 항복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프랑스와 벨기에를 가로질러 1945년 7월 3일 영국으로 이동하면서 8개월 동안 가족을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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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히로시마에 대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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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베라인의 일원으로 “핵물리 연구보고서(Nuclear Physics Research Reports)”를 발표한 저명한 독일 과학자 중 9명은 알소스 작전에 의해 체포되어 엡실론 작전(Operation Epsilon)아래 영국에서 투옥되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10명의 독일 과학자들이 영국의 팜 홀(Farm Hall)에 억류되었습니다. 그 시설은 영국의 해외 정보국 MI6의 안전가옥이였습니다. 구금된 동안 그들의 대화는 녹음되었습니다. 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대화는 전사되어 영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녹취록은 1992년에 발표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팜 홀의 과학자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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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폭탄이 만들어지고 떨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몇 주 동안 독일 과학자들은 미국이 어떻게 폭탄을 만들 수 있었는지 논의했습니다. 팜 홀 기록에 따르면 하이젠베르크는 오토 한과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를 포함하여 팜 홀에 억류된 다른 물리학자들과 함께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과학자들에게 자신은 폭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에너지를 생산하는 원자 파일만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나치를 위한 폭탄 제작의 도덕성도 논의되었습니다. 소수의 과학자들만이 핵무기의 가능성에 대해 진정한 공포를 표했고,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데 신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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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원자폭탄 제작에 실패하자, 하이젠베르크는 “우리는 1942년 봄에 정부에게 원자폭탄을 제조하기 위해서 120,000명을 고용해야 한다고 권고할 도덕적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습니다. 다음 보고서는 독일 우란베라인의 내부 간행물인 “핵물리학 연구보고서 (Kernphysikalische Forschungsberichte)”에 게재되었습니다. 보고서는 극비로 분류되었고 배포가 매우 제한적이었고 저자는 사본을 보관할 수 없었습니다. 보고서는 연합군 알소스 작전에 따라 압수되었고 평가를 위해 미국 원자력 위원회로 보내졌습니다. 1971년에 보고서는 기밀 해제되어 독일로 반환되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카를스루에 핵연구 센터와 미국 물리학 연구소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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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연구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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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뒤 나치 독일의 핵개발 계획인 우란프로옉트에 참여한 나치 부역 혐의는 무죄로 처분되었습니다. 1946년 1월 3일, 10명의 엡실론 작전 억류자들이 독일의 알스웨데로 이송되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연합군이 점령한 독일의 영국 지역인 괴팅겐에 정착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즉시 독일에서 과학 연구를 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에 오브닌스크의 제5연구소 소장인 독일 과학자 하인츠 포즈(Heinz Pose)는 하이젠베르크에게 소련에서 연구하도록 초대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는 소련의 노동 조건과 가용 자원, 독일 과학자에 대한 소련의 호의적인 태도를 칭찬했습니다. 배달원이 1946년 7월 18일자 채용 편지를 하이젠베르크에게 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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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는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연합군 통제 위원회(Allied Control Council)에 의해 카이저 빌헬름 협회가 폐지되고 영국 지역에 막스 플랑크 협회가 설립된 후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의 소장이 되었습니다. 막스 폰 라우에가 부소장으로 임명되었고 칼 비르츠(Karl Wirtz),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루트비히 비어르만(Ludwig Biermann)이 합류하여 하이젠베르크의 연구소 설립을 도왔습니다. 하인츠 빌링(Heinz Billing)은 전자 컴퓨팅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1950년에 합류했습니다. 연구소의 핵심 연구 초점은 우주선이였습니다. 연구소는 매주 토요일 오전에 콜로키움을 개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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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슝스라트 (Forschungsrat) (연구 위원회)를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새로 설립된 독일 연방 공화국과 독일에 기반을 둔 과학계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이 포르슝스라트를 계획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포르슝스라트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기관은 1951년 독일 과학 비상 협회(Notgeminshaft der Deutschen Wissenschaft)와 통합되었고 같은 해 독일 연구협회 (Deutschungsgemeinshaft)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합병에 이어서 하이젠베르크는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오데르-나이세 선(Oder–Neiße line)을 독일과 폴란드의 공식 국경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서독의 핵무장 가능성에 반대하는 튀빙겐 각서(Memorandum of Tübingen)의 서명자 8명 중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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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에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Physics)는 뮌헨으로 이전되어 확장되었으며 막스 플랑크 물리학 및 천체 물리학 연구소(Max-Planck-Institut für Physik und Astrophysik)(MPIFA)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하이젠베르크와 천체물리학자 루트비히 비어르만(Ludwig Biermann)은 MPIFA의 공동 책임자였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또한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 MPIFA의 단독 책임자였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1970년 12월 31일에 MPIFA의 책임자직을 사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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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과학 협력 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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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하이젠베르크는 유럽의 핵물리학 연구소 설립을 목표로 유네스코 회의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과학대표가 되는 데 동의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목표는 서구권 과학자들의 자원과 기술을 활용하여 대형 입자 가속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953년 7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연방 공화국을 대표하여 CERN(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을 설립하는 협약에 서명했습니다. CERN의 창립 과학 책임자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거절했습니다. 대신, 그는 CERN의 과학 정책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고 CERN에서 과학 프로그램을 결정했습니다. 1953년 12월 하이젠베르크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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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재임 기간 동안 78개국에서 온 550명의 훔볼트 학자들이 과학 연구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죽기 직전에 회장직을 사임했습니다. 늘그막에 두 학생이 하이젠베르크에게 찾아와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그딴 쓰레기 이론은 집어치우라고 말했고, 학생들은 낙심하여 돌아갔습니다. 그 "쓰레기 같은 이론"은 힉스장에 관한 이론이었고, 학생들의 이름은 힉스 이론을 제안한 제럴드 구럴닉 박사와 칼 헤이건 박사입니다. 또한 생전에 쿼크에 대하여 회의적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생전에 양자역학에 회의적이었던 아인슈타인과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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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는 1937년 4월 29일 엘리자베스 슈마허와 결혼한 후, 1938년 1월에 이란성 쌍둥이 마리아(Maria)와 볼프강(Wolfgang)이 태어났으며, 이에 따라 볼프강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의 기본 입자 물리학에서 쌍생성의 과정에 대한 단어인 "쌍 창조"를 사용하여 하이젠베르크의 이란성 쌍둥이 아이들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 부부는 이후 12년 동안 바바라(Barbara), 크리스틴(Christine), 요헨(Jochen), 마르틴(Martin), 베레나(Verena) 등 다섯 명의 자녀를 더 두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1976년 2월 1일 자택에서 신장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다음날 저녁, 그의 동료와 친구들은 물리학 연구소에서 그의 집까지 추모하기 위해 걸어가서 촛불을 켜고 그의 문 앞에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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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는 뮌헨 발트프리드호프 (Waldfriedhof)에 묻혔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아들인 마르틴 하이젠베르크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의 신경생물학자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요헨 하이젠베르크는 뉴햄프셔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손자인 베냐민 하이젠베르크는 영화감독입니다. 1980년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하이젠베르크는 “정치인의 정치 생활(De, Das politische Leben eines Unpolitischen)”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에서 그녀는 하이젠베르크를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사람, 그 다음은 뛰어난 과학자, 그 다음은 매우 재능 있는 예술가, 그리고 네 번째로 의무감으로부터의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로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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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철학과 사상 – Philosophy and Thought of Werner Heis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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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는 동양 철학을 존경했고 동양 철학과 양자 역학 사이의 유사점을 보았고 자신을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이라는 책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인도 철학에 대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와 대화한 후 “너무 미친 것처럼 보였던 일부 아이디어가 갑자기 훨씬 더 이해가 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관련하여 하이젠베르크는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싫어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과 언어에 대한 그의 철학”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하이젠베르크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보내는 마직막 편지에서 쓰기를: “우리는 선하신 주 하느님이 아원자 입자의 위치를 알고 계셔서 인과관계 원리가 계속 타당성을 가지도록 하신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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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우주가 근본적인 수준에서 불확실하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양자 물리학은 불완전함에 틀림없다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연과학이라는 잔을 한모금 마시면 당신은 무신론자가 될 것이지만, 그 잔 밑바닥에서 신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950년대에 행해진 강의에서 나중에 “물리학과 철학(Physics and Philosophy)”으로 출판된 책에서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적 진보가 문화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현대 물리학이 “현재 세계의 통합과 확장을 향한 경향이 있는 일반적인 역사적 과정의 일부”라고 표명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가 1974년 로마노 구아르디니 상(Romano Guardini Prize)을 받았을 때 그는 연설을 했고 나중에 “과학과 종교의 진리(Scientific and Religious Truth)”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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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숙고했습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유명한 갈릴레오의 재판 이후로, 과학적 진리는 세상의 종교적 해석과 조화될 수 없다고 반복해서 주장되어 왔다. 나는 이제 과학적 진리가 그 자신의 분야에서 공격할 수 없다고 확신하지만, 종교적 사고의 내용을 단순히 인류 의식의 시대에 뒤떨어진 단계의 일부, 우리가 포기해야 할 부분으로 일축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따라서 나는 살아오면서 이 두 사고 영역의 관계에 대해 반복적으로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의 실재성을 결코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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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의 내용 – Content of The Part and The W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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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하이젠베르크는 대중 시장(mass market)을 위해 자서전 부분과 전체를 독일에서 출판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1966년 그의 공개 강의가 철학과 종교의 주제로 점차 바뀌면서 이 부분과 전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출판을 위해 히르젤 베를라그(Hirzel Verlag)와 존 와일리 & 선즈(John Wiley & Sons)에게 통일장 이론에 관한 교과서의 원고를 보냈습니다. 그가 출판사 중 한 사람에게 쓴 이 원고는 그의 자서전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을 구성하기를: 1) 정확한 과학의 목표, 2) 원자 물리학에서 언어의 문제, 3) 수학과 과학에서의 추상화, 4) 물질의 가분성 또는 칸트의 이율배반, 5) 기본 대칭 6) 과학과 종교 등으로 하였습니다. 부분과 전체라는 책은 그와 그의 지인이 여러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그의 생애를 망라하여 쓰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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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과학 외적으로 하이젠베르크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자서전식으로 기술되어있습니다. 또 자서전격인 이 부분과 전체에서는 양자역학에서 제기되는 온갖 철학적,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주제가 다루어집니다. 이 책은 하이젠베르크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 18살때부터 노년까지를 회상하며 쓴 자서전이다 보니 여러 명의 기라성같은 과학자들이 나오고, 그 과학자들의 이론과 사상, 철학적 입장과 그 당시의 시대인 20세기 초반의 독일과 유럽 및 미국의 정치 상황까지 상세히 나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기 전에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역사적 상황과 양자역학에 대한 기초적인 정성적 내용 정도는 알고 읽는 것이 좋으며, 그렇지 않으면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또한, 이 책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과학사가들에게는 골칫거리로 여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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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역사적 사건을 더 간결하게 만들기 위해 요약했다고 썼습니다. 출판 당시 파울 포르만(Paul Forman)은 “과학(Science)” 저널에서 “이제 합리적으로 재구성된 대화 형식의 부분과 전체라는 회고록이 있습니다. 이 책은 갈릴레오가 잘 알고 있는 대화는 그 자체로 가장 교활한 문학적 장치라서: 활기차고, 재미있고, 특히 의견을 암시하는 데 적합하면서도 그에 대한 책임은 회피합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과학 회고록은 거의 출판되지 않았지만 콘라트 로렌츠와 아돌프 포르트만(Adolf Portmann)은 광범위한 청중에게 학문을 전달하는 대중적인 책을 저술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자서전을 작성하여 뮌헨의 피페르 베르라그(Piper Verlag)에서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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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는 처음에 “원자 물리학에 대한 대화(Gespräche im Umkreis der Atomphysik)”라는 제목을 제안했지만, 이 자서전은 결국 “부분과 전체(Der Teil und das Ganz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1971년 초 영어 번역은 “물리학 및 그 너머 (Physics and Beyond): 만남과 대화 (Encounters and Conversation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다른 언어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만으로 하이젠베르크의 삶을 모두 알기에는 부족합니다. 그가 왜 교수가 되었는지, 노벨 물리학상 수상 당시의 그가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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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와 관련하여 관심을 끄는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1) 대학 동창인 볼프강 파울리와는 매우 친했습니다. 그의 저서인 ‘부분과 전체’에 따르면 이와 관련한 일화가 나옵니다. 볼프강 파울리는 죽을 때까지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2) 그의 스승으로는 닐스 보어, 조머펠트, 막스 보른이 있습니다. 그중 닐스 보어와 특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그와 함께 여행을 가거나 휴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 중 잠시 나치의 포로로 있던 유대인인 닐스 보어와 그가 나눈 대화는 나치의 핵무기와 관련한 것이었는데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영원한 비밀로 남겨져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로 두 가지의 설을 논합니다. 첫 번째 가설은 그가 보어에게 나치의 핵 개발이 거의 완성되었으니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지 말고 미국과 유럽을 제외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라는 가설입니다. 두 번째 가설은 그가 보어에게 자신이 나치의 핵 개발을 의도적으로 늦출테니 빨리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라는 가설입니다. 두 가설의 공통점은 그가 스승인 닐스 보어의 안전을 생각했다는 겁니다. (3) 젊은 시절 청년운동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젊은 대학생들끼리 하이킹을 하거나 노동자들에게 과학 강연을 하는 등, 오늘날 '청년운동'이라 연상하기 쉬운 거창한 정치-사회적 가치에 관한 것보다는 소박한 일들을 주로 하였습니다. (4) 미국의 시리즈물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가 사용하는 가명 '하이젠버그'는 하이젠베르크의 영어 발음입니다. 해당 작품이 크게 히트한 덕분에 물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한테도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습니다. (5) 바이오하자드 빌리지의 악역 칼 하이젠베르크의 이름도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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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의 ‘부분과 전체 (The Part and The Whole)’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분과 전체를 통해서 하이젠베르크가 과연 나치의 핵개발을 사보타주했는지 많은 궁금증을 만듭니다. 과연 하이젠베르크는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있었을 까요?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고 그 내용에 대해 함께 토론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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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54번째 책 인문학 부문 24번째 책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Werner Heisenberg)가1969년에 출간한 ‘부분과 전체 (The Part and The Whole)’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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