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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 국공합작(國共合作)의 원조(元祖)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이동휘(李東輝) 선생님

이야기

by 黃薔 2022. 7. 1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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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Vfp1QEiP6g

국공합작(國共合作) 원조(元祖)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이동휘(李東輝, 1873 6 20~1935 1 31) 선생님

2020. 12. 27.

國共合作, 愼獨齋 金集, 芝雲 金綴洙, 誠齋 大自由 李東輝, 국공합작, 성재 대자유 이동휘, 신독재 김집, 지운 김철수

'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의 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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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은 고려인들이 코민테른의 혁명자금만 노리는 분파와 분열만 획책하는 혁명화 대상의 적성 민족으로 각인시키는 비극의 실마리 제공한 과정도 살펴보겠습니다. 러시아 조선인들은 레닌을 도와 1917 러시아혁명을 성공했습니다. 1918년에 이동휘 선생님은 러시아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코민테른에 국제당 승인을 받기위해 1919년에 레닌의 측근으로 레닌을 도와 혁명을 성공한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님을 코민테른에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한인사회당의 부실한 조직력과 사회주의 정강의 미숙함을 들어 코민테른 국제당 승인과 지원을 보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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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와 합작 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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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동휘 선생님은 조직력 강화를 목적으로 민족(民族)주의 세력인 상해임시정부와 민공합작(民共合作)을 단행했습니다. 이동휘 선생님은 1919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며 국무총리에 취임했습니다. 조직력 강화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코민테른에서 요구하는 사회주의 정강 요건을 맞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코민테른에서는 박진순 선생님을 통해 1916년 일본에서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1920년 조선에서 사회혁명당을 결성하였으니 러시아 한인사회당과 연합하여 조선의 사회혁명당의 정강으로 고려공산당을 만들면 국제당의 지위와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코민테른의 국제당 조건을 충족 시켜 1921년 이동휘 선생님의 러시아 한인사회당과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조선 사회혁명당이 연합하여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이동휘 선생님을 당수로 추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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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합작(國共合作) 대한 이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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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과 1923 중국에서 국공합작(國共合作) 둘러싸고 코민테른 내부와 중국공산당 내에서 이견이 발생했습니다. 코민테른에서 중국공산당에 파견한 '마링(馬林)' 국민당은 부르주아 정당이지만 모든 계급이 연합한 당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민당에 들어가 그것을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변모시킬 있다는 주장을 하며 국공합작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진독수(陳獨秀)’ 국민당은 부르주아 정당의 하나일 뿐이며 공산당이 가입하여 부르주아와 뒤섞이면 당의 독립성을 상실한다며 국공합작을 반대하여 서로 주장이 첨예하게 맞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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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의 민공합작은 국공합작의 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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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6 중국공산당 3 대회에서 이동휘 선생님의 민공합작의 예를 들어 중국공산당의 국공합작을 의결하였습니다. 마링(馬林)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도자 이동휘 선생님이 민족주의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조직력이 강화되었음을 중국공산당 3 대회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코민테른이 보낸 당대회 격려편지에서도 이동휘 선생님의 "민족주의단체인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함께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내면서도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의 혁명운동에서 주체적 요인을 형성할 "이라는 입장을 올바른 노선으로 평가했습니다. 결국 중국공산당 3 대회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과 공산당원이 개인 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1919 러시아 한인사회당 이동휘 선생님이 상해임시정부에 개인자격으로 참여하여 국무총리에 취임한 것이 중국공산당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국공합작의 전범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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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르뷰로(高麗局)의 탄생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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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23 1월부터 6월까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 혁명자금으로 지원한 상해임시정부의 진로와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에서 패권 다툼으로 개조파와 창조파가 대립하여 결과를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이미 1921년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상해파' '이르쿠츠크파를 곤경에 몰아넣은 코민테른의 쿠시넨 같은 유대인들은 집요하게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을 사주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민테른 꼬르뷰로(高麗局)를 설치하고 상해 고려공산당을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인해 1923 12월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도자 이동휘 선생님은 꼬르뷰로를 탈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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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그뷰로(組織局)의 탄생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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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이동휘 선생님과 박진순 선생님을 지원하던 레닌이 1924 1월 사망하자, 그해 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조선 문제에 대한 위원회를 소집하는데 여기에서 보이찐스키와 쿠시넨의 견해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보이찐스키는 상해파를 지지하며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임시정부 같은 민족주의적 단체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쿠시넨은 조선 공산주의자가 임시정부 같은 민족적 단체에 참가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상해파를 비난했습니다. 더군다나 코민테른의 국제당에 대한 협력방침이 스탈린에 의해 지도방침으로 바뀌어 그해 3월 꼬르뷰로를 해체하고 간섭이 더 심해진 오르그뷰로(組織局)를 신설하여 잡다한 조선 사회주의 단체의 통합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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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그뷰로(組織局)의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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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넨 같은 코민테른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은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은 1924 4 1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철훈(金哲勳), 박응칠(朴應七), 남만춘(南萬春), 전우(田友), 장도정(張道政), 이형근(李衡根), 이젤손 등이 책임자 회의를 개최하고 5 7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를 개최하며 오르그뷰로를 창립했습니다. 그러나 오르그뷰로는 사회주의 정강도 마련하지 못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조선 내의 사회주의 혁명가의 자질을 가진 대표들도 참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설치되었다가 1년 뒤에 코민테른의 자금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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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화 대상민족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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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을 장악한 스탈린은 쿠시넨 같은 유대인들의 수작을 간파하지 못 한 체 고려인들은 자유시참사를 일으켜 무장항일 자기동족을 몰살하며 코민테른의 혁명자금만 노리는 분파와 분열만 획책하는 혁명화 대상의 적성 민족으로 각인시키는 비극의 실마리가 되어 1930년대 수많은 고려인 지도자들이 처형당하고 또 숙청당하고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하여 3만을 아사시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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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이 쓰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 선생의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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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더러 게걸음을 한다는 핀잔을 두고, (가재?)를 우회적으로 예찬했습니다. 청산에 한 줄기 샘물일지언정 강호 만 리 넓은 세상이 (더러운) 물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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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步有能後步能(전보유능후보능) 앞으로도 잘 걷고 뒤로도 잘 걷네.

背石穿砂自作家(배석천사자작가) 돌을 지고 모래를 뜷어 자기집을 짓는도다.

靑山一脈寒泉裏(청산일맥한천리) 청산 속에 차디찬 한줄기 물일지언정

不願江湖萬里波(불원강호만리파) 강호만리의 물결은 되기 싫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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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발 갈 수 있다면 뒷 발도 갈 수 있고

등딱지로 모래 뚫어 스스로 집을 짓네.

푸른 산 한 자락 차거운 샘 속에서

세상의 만리풍파를 원하지 않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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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은 19966월 고려대에서 『미당 서정주시 연구 (未堂 徐廷柱 詩 硏究 )』로 박사학위를 받고 우주베키스탄 등에서 코이카 한국학 교수를 지내시다 고려대 조치원분교 교양학부 국어 교수로 은퇴하신 양금섭 교수님께서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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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망친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여운영과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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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의 흔적을 살펴보겠습니다.

1919 9월 전로한인공산당

1920 1월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

1920 7 '전로고려공산당 중앙총회'

1921 5월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 고문에 보리스 스미야스키, 위원장 김철훈, 군정부장 최고려, 오하묵, 비서장 이성

1921년에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적하고자 상하이에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 지부를 설치하여, 여운형, 김만겸, 조동호 등이 위원으로 활동

1922 12월 코민테른의 주도로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함께 해체되었고, 이후 꼬르뷰로(1923.2)를 설치

1925년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 청년회 주요간부로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이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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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朴憲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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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朴憲永) 1900 5월 충남 예산에서 몰락한 양반·지주 영해(寧海)박씨 박현주(朴鉉柱)와 양모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서자로 출생했습니다. 생모는 과부에서 재가한 이학규(李學圭)입니다. 대흥소학교 졸업 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YMCA 활동을 했습니다. 미국 유학을 꿈꾸었고 일본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도 했습니다. 그러다 상해 고려공산당에서 구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920 11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 상해는 이동휘 선생님의 러시아 한인사회당과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조선 사회혁명당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며 코민테른의 국제당으로서의 지위로 동양권의 공산혁명 지도와 자금 집행으로 상해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인해 사회주의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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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朴憲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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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직업혁명가를 꿈꾸는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상해로 모였습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정보조직도 선교사 등으로 위장하여 상해로 모여 고려공산당, 중국공산당, 일본효민공산당 창당의 모습과 실체를 파악하기에 바빴습니다. 박헌영도 그중에 하나였고 또 코민테른의 구미 유학생에 합격하기 위한 준비 학교도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그 준비 학교의 학생으로는 김단야, 임원근, 주세죽, 현에리스 등이 있었고 박헌영도 그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조선인과 중국인 각각 40명 정도를 선발하는 코민테른 구미 유학생 선발에는 이미 일본 유학 경험이 있고 학식이 출중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출신 나용균, 와세다대학 학사 출신 장덕수, 도쿄조시가쿠인(東京女子學院) 출신 김마리아, 상해동제대학 출신 이극로 등 학사학위 이상의 쟁쟁한 조선의 수재들이 지원하여 경성제일고보 출신 박헌영은 불합격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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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呂運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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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의 상해 지부장으로 있던 여운형(呂運亨)은 박헌영을 비롯한 준비학교 불합격생들에게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이므로 코민테른의 자금으로 원하는 구미 유학도 시켜주고 직업적 사회주의 혁명가도 시켜주겠다고 회유하여 떼거리로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에 가입시켰습니다. 공산당선언과 사회주의 사상을 이해해야 하는 까다로운 상해 고려공산당 가입보다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은 자격심사 없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지만 엄격한 코민테른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코민테른의 승인이나 경제적 지원이 없어서 실제로 직업적 사회혁명가가 될 수 없었고 더더욱 구미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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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呂運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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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학술적인 심화교육 보다는 선동 선전술 위주의 교육을 하는 단기과정의 국제레닌학교나 동방노력공산대학 수료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조선에서 상해를 거쳐 여운형을 따라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의 사회주의 관심자들은 스스로 먹고살아야 하는 경제적 여건으로 인하여 와해되고 박현영은 미국 정보기관의 지원을 받아 상해에 머무르고 있던 현순 목사의 도움을 받아 다소 경제적인 곤란함을 해결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현순 목사는 미국정보기관과 박헌영을 이어주다 함께 북한에서 처형된 미군혁역장교출신 미정보요원 현앨리스의 부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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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기억한 20대의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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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에서 자금을 집행하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코민테른의 구미 유학생에 합격하기 위한 준비학교를 다니던 20살의 박헌영을 소상하게 기억했고 현순 목사 등을 통해 미국의 간첩이 된 걸 추측했으며 1927년 코민테른의 세계정세교육 시 받은 미국과 일본의 간첩 일을 하는 조선 혁명가의 명단에서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준비 학교를 다니던 박헌영은 영특하긴 하였으나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미국 유학을 가고자 함을 숨기지도 않아 사회주의 혁명가의 자질이 없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또한 지원자들이 이미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여 전공 심화가 이미 되어 있었고 유학을 하러 가고자 하는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어 박헌영 같은 고등보통학교 졸업 수준으로는 합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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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독수가 육성한 196명의 불란서 유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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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이 나중에 들으니, 중국공산당의 진독수 선생은 상해 불란서 조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40명분의 장학금으로 등소평, 주은래 등 사회주의 열성 청년 196명을 선발하여 불란서 한곳으로 유학을 보냈다고 합니다. 196명 전원 불란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모택동을 도와 중국공산당을 통하여 신중국을 건설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생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진독수 선생에게 부탁하여 더 많은 조선의 청년들에게 서구문물을 배워올 기회를 주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함을 아쉬워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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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고려인 혁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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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박진순 선생님과 레닌의 인연으로 인해 코민테른 국제당 지위와 자금지원으로 인해 명실상부한 동양권의 공산 지도국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활동을 시샘한 코민테른의 유대인들과 사회주의 혁명가 자질도 갖추지 못한 여운형과 같은 조선의 얼충이 지도자들이 상식에도 어긋나게 러시아영토에 있는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이나 가능한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을 부추겨 11국 원칙에 어긋나게 패권 쟁탈을 벌여 결국 스탈린의 미움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박진순 선생님 같은 수많은 러시아 고려인 지도자들은 사형을 당하고 20만 고려인은 혁명화 명분으로 집단이주를 당해 그 와중에 3만이 얼어 죽고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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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가 바라본 여운형과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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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안타까운 일은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해방 후 14년만에 출옥한 후에 여운형, 박헌영 같은 인사들을 만나보니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참담한 죄악인 줄 눈곱만큼도 반성하지 않고 해방된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며 남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은 체 자신들의 허망한 주장만 하는 모습에 그 참담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생전에 박헌영이 진짜 미국 간첩이냐는 질문에 그놈은 간첩보다 더한 놈으로 자신의 야망을 위해 온 민족도 몰살할 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잊지 않고 이런 이야기 듣고나 말지 제 목숨 보전을 위해 말을 아끼란 말씀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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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혁명가나 운동권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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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나 미군정시절이나 2020년대나 우익적폐 세력과 더불어 사회주의 혁명가나 운동권 출신이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오직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향해 달리는 인사들을 보게됩니다. 한국 국민들이 그자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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