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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루카치 죄르지의 역사와 계급의식 - 맑스 레닌주위로 돌아가자는 절규

이야기

by 黃薔 2022. 12. 22.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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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BisGF1ihfs

35. 루카치 죄르지 (Lukács György, 1885-1971)의 역사와 계급의식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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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이성계는 목은 이색으로부터 교육받은 정도전이 경국전으로 집성한 유학자들이 이끄는 유교이상국가 건설에 동참하여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고려를 붕괴하고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이 모든 것을 차지하려는 이방원의 야욕과 패권쟁취, 왕자의 난을 통해 유학자들이 이끄는 유교이상국가 건설을 무산시키고 집권하여 경국전을 파기한후 확실한 왕권국가를 담은 경국대전을 내세웁니다. 이방원은 유교이상국가를 건설하려던 정도전과 이성계의 꿈을 좌절 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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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러시아는 착취 받는 노동자 농민이 왕족과 자본귀족을 몰아내고 맑스 사상으로 무장한 레닌이 이끄는 노동자 농민의 정부수립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하자 스탈린은 조선의 이방원처럼 맑스주의를 말살하고 자신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스탈린주의를 앞세워 1917년의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을 무산시켜버렸습니다. 루카치는 용감하게 스탈린주의를 맑스주의로 회복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럼 그런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을 통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 알기 위해 그의 생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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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죄르지 (Lukács György)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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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죄르지는 문학은 현실의 특수한 반영이라는 유명한 테제와 함께 리얼리즘 문제에 천착한 미학자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1918 헝가리 공산당원으로 헝가리 혁명에도 참여한 가장 확신에 찼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루카치 죄르지는 헝가리 출신 맑스주의 철학자ㆍ미학자ㆍ문예이론가ㆍ혁명가이자 비평가 후기 자본주의를 '물신화(reification, Verdinglichung)' 개념으로 분석하여 비판 이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리얼리즘 문학론과 문예비평, 미학  광범위한 지적 영역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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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시절부터 공산주의 입문, 형가리 혁명, 소비에트 공화국에서의 활동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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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죄르지(Lukács György, 1885~1971) 본명이 뢰빙게르 죄르지 베르나트 (Löwinger György Bernát) 현대를 대표하는 헝가리의 문예 사상가이자 맑스주의 사상가입니다. 루카치는 1885 4 13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계 유대인 은행 중역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다페스트,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미학(美學) 배우고 헤겔, 지멜과 막스 베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902 혁명적 사회주의학생동맹에 참가하고 문필활동도 시작했으며 1904년에는 새로운 연극운동인 자유극장(自由劇場) 운동에 참가하여 타리아 협회의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1908 현대 드라마 발전사 저술하여 19세기초의 작가 키슈파르디를 기념하기 위한 문예협회상을 받고 1911년에 출간했습니다. 루카치는 1909년에 베를린대학에 유학했고 1917년까지는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 등지에 머물렀습니다. 루카치는 1 세계 대전 무렵부터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에 접근하는 동시에 헝가리의 생디칼리스트인 에르빈 사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1910년에 저술한 정신과 형식 1911년에 독일어역 증보판으로 출판하고, 1916년에 소설의 이론 잡지에 발표했습니다. 1918 12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하여, 이듬해 19193 헝가리 혁명으로  벨라(1886~1939) 수반으로 하는 혁명평의회정부가 성립되자 교육인민위원, 5적군사단의 정치위원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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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후의 지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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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개인적으로 유물론연구소를 부다페스트에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월말에 혁명정권은 붕괴되어버리고 9월에 빈으로 망명했습니다.  1920년대에 루카치는 정치활동을 하면서 맑스주의 사상을 심화했습니다. 1923년에 역사와 계급의식 1924 년에 레닌 그리고 1928 년에 부룸 테제(Blum-Thesen)’ 써서 혁명이 좌절한 이유와 맑스주의 주체성(主體性) 문제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역사와 계급의식 좌익편향, 부룸 테제(Blum-Thesen)’는 우익편향이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형식적인 자아비판을 하고 정치활동에서 물러나 1929년말 모스크바로 가서 콤아카데미의 맑스·엥겔스 연구소원이 되고, 한때 ()파시즘 투쟁을 위해 유럽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나 전쟁  대부분을 모스크바에서 연구 활동을 하며 발자크론 비롯하여 많은 근대문학·사상사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습니다. 1931 베를린으로 가서 독일작가 방위동맹 베를린 지구 부의장을 역임함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혁명 작가동맹에 참가하여 기관지인 좌곡선(左曲線)’ 그의 이론을 펼쳤습니다. 1933 이후 소련에 있으면서 소비에트 과학 아카데미의 철학연구소에서 연구하고 국제문학’, ‘문예비평가, ‘언어’, ‘새로운 목소리  잡지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고 맑스주의 문예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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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헝가리 귀국과 학술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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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후, 1945 8월 헝가리 해방과 함께 부다페스트 대학에 미학  문화철학 교수로 귀임한 루카치는 임시국민의회 의원이 되고, 1948 세계평의회 평의원이 되었습니다. 1946년에 제네바의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맑스주의의 입장에서 야스퍼스나 메를로 퐁티  실존주의자와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 토론의 논전을 기초로 하여 실존주의 비판과 맑스주의의 현대적 과제를 제시한 5편의 독립된 논문으로 구성하여 1948년에 펴낸 실존주의냐, 맑스주의냐는 루카치의 후기 대표작입니다. 이외에도 적극적인 저술활동을 펼쳐 1947년에 발표한 문학과 민주주의 부르주아 문학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2 세계대전 이전부터 전후에 걸친 많은 저작은 1947 괴테와  시대’, 1948 젊은 헤겔’, 1949 세계문학에서 러시아 리얼리즘’, 1952 발자크와 프랑스 리얼리즘’, 1953 독일문학 소사(小史)’, 1954 이성의 파괴’, 1955 역사소설론’, 1955 리얼리즘의 제문제  수많은 저서로 정리되었습니다. 그 성과로 만 70세를 맞은 1955년에 헝가리 독립전쟁의 지도자 코슈트 로요슈를 기념하기 위한 코슈트 국가대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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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금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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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 10 스탈린주의에 대항한 헝가리 혁명 기간 중에 너지 임레(1896~1958) 내각에서 인민교육부장관을 지냈습니다. 루카치는 너지와 그의 정권에 대해 애초부터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개혁주의적 경향" 있다고 비판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너지가 재집권 이후의 계획,  "강령" 없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하지만 민중운동에 휘둘리면서도 동시에 민중운동을 그나마 사회주의적  안에서 유지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내각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는 것을 반대하여 먼저 사임했습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남는 것이 서구와 소련 모두의 개입을 막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카치는 소련의 침공으로 부다페스트가 함락되자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끌려나와 소련군에 의해 너지와 함께 루마니아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처형을 모면하고 다음해 1957 본국으로 송환되어 연금되었습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건으로 먼저 사임했기에 너지 정권의 동조자가 아니라고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구권에서 격렬히 비판받아 동독에서 그의 책을   없어 미학 1 미적(美的) 것의 특성 1963년에 서독에서 출판되었습니다. 그 이후 루카치는 미학ㆍ존재론ㆍ윤리학 등 저술 연구에 매진하다가 1971 6 4 86세로 출생지인 부다페스트에서 세상을 떴습니다. 말년의 루카치는 맑스주의 입장에서 윤리의 문제를 파고드는 작업에 몰두했는데, 이를 위해선 존재론으로  기반을 먼저 닦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존재론과 고투를 벌인 결과물이 바로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을 위하여라는 존재론 윤리학 사후 유고집으로 남겼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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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권과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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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는 비공식적으로 출당되었으나, 1967 복당되었습니다. 루카치는 복권 다음  벌어진 프라하의 봄에 대해서 지지했으나, 당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언급하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있었던 철학자 대회에 참석하지 않는 방식으로 의견을 피했습니다. 루카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둘다 위기에 처한 상황 속에서, 스탈린주의로 만신창이가  맑스주의 보편적인 조작과 소외를 극복할  있는 이론적 힘과 파토스를 지닌 진정한 맑스주의 재구축하고자 시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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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죄르지 (Lukács György)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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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는 청년기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 커다란 변모를 겪었습니다. ‘혼과 형식까지의 루카치는 주로 신칸트파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문학사회학과 신비적 주관주의 사이를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소설의 이론 루카치는 헤겔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으며  글에는 좌익적 윤리감이 흐르고 있어 그것이 그를 역사와 계급의식 단계로 이끌어갔습니다. ‘역사와 계급의식 맑스주의 사상가로서 그의 명성을 확립한 저작이고, 맑스주의 전체의 운동과 발전 속에서 '전체성' 범주나 맑스주의에서 변증법적 측면 등을 강조하며, 또한 계급의식이나 소외의 본질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경제적 객관주의를 지나 맑스주의에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습니다. 또한 부룸 테제 비합법 헝가리 공산당 2 대회의 정치보고 초안으로 씌어진 것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직접적인 이행이 아니라 과도적 형태로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 주장하고 있는데,  견해를 기조로 해서 루카치는  후의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헝가리 동란  루카치는 정치적으로는 평화공존을 주장하며 스탈린을 비판했습니다. 또한 문학에서는 이전부터 표현주의나 전위예술 등을 비판해왔는데 이와 함께 혁명적 낭만주의도 비판했습니다. 미적인 것의 특성 현실의 미적 반영과 과학적 반영을 대비시키면서 맑스주의 미학의 기초를 구축하고자  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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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계급의식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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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으로 구성된 역사와 계급의식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루카치가 1923년에 펴낸 대표작입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성공했으나 1918년의 독일혁명과 1919년의 헝가리 혁명은 실패했습니다.  헝가리 혁명에 참가했던 루카치는 망명지인 빈에서  혁명이 좌절한 원인을 구명하고 유럽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다시 소생시키기 위한 이론적 연구를 시작하여, 계급의식 비롯한 7편의 논문을 써서  권으로 묶은 것이 바로 이  역사와 계급의식입니다. 역사와 계급의식이라는 제목의 단순함과 명확함에 비해,  책은 제법 많은 선행학습이 필요합니다.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을 알아야 하고, 맑스를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비판적 방법이라는 말로 루카치가 의미하는 것은 칸트주의적 경향의 독일 관념론을 염두에  것입니다.  개념신화학이라는 말로 염두에  것은 개념을 신비화하는 헤겔의 관념론적 체계입니다. 또한 변증법 총체성’, ‘구체성’, ‘현실성 등의 개념은 선행된 헤겔과 맑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선행학습 후에 읽는다면, 변증법적 인식론을 접할수 있고, 잘 정리된 헤겔과 맑스의 철학적 표현을 느낄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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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맑스주의의 주류로 2 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이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인간의 의식이나 행동을 오직 객관적인 사회의 존재 양식으로부터 설명하려 하였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의 인간의 능동적 역할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루카치는 역사의 변혁에 있어서 의식이 수행하는 적극적 역할을 중요시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만이 역사의 방향을 바르게 파악하는 이유를 밝히고, 부르주아 계급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헤겔과 맑스를 결합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의식과 사회는 끊임없이 분열하고 인간은 물욕화()된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화폐가 교환의 척도가 됨에 따라 모든 물건이 화폐를 통해 교환   있다는 생각,  물건 본질에 숨겨진 자본과 노동의 과정을 무시해버리는 왜곡된 의식과정인 물신화(物神化)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물신화로 인해 사람들은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허위의식 속에서 현실세계를 인식하게 됩니다. 허위의식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합리적이고 적절한 이해를 방해함으로써 사람들이 계급의식을 가질  없도록 만들며,  극복의 길을 추구했습니다. 맑스주의에 있어서 이데올로기론과 인간 소외의 사상은 선구적 업적입니다. 물론,  역사와 계급의식 맑스주의 혹은 레닌주의에 대한 철학화를 시도했다는 이유로 여러 공산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고 후일 자아비판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자 그러면 역사와 계급의식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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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계급의식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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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통 맑스주의란 무엇인가?’ 이론과 실천: 변증법적 방법의 의미’, ‘사실과 총체성: 자연과학과 변증법’, ‘변증법적 방법과 속류 맑스주의의 방법’, ‘현실의 문제: 헤겔과 맑스’, ‘의식과 존재: 사적 유물론과 프롤레타리아트 등 총5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 맑스주의자로서의 로자 룩셈부르크 맑스주의에서의 총체성’, ‘맑스주의의 속류화’, 자본축적론의 문제사적 서술’, 룩셈부르크에서의 당과 혁명 등 총4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 계급의식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 ‘전자본주의사회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계급의식’, ‘부르조아지와 소부르조아지의 계급의식’, 속류 맑스주의자의 계급의식’,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등 총5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은 상품구조와 사물화, 사물화와 합리화, 사물화와 과학을 다루는 사물화 현상’, 인식원리, 실천원리, 예술원리의 이율배반과 모순의 변증법적 극복: 역사적 생성의 입장을 다루는 부르조아 사유의 이율배반’, 직접성과 매개의 변증법, 질과 , 고정성과 과정성, 경험적 사실과 발전적 경향, 상대주의와 역사변증법, 이론의 실천으로의 전화를 다루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 등 총3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 사적 유물론의 기능변화를 다루고 있고 6 합법성과 비합법성 혁명과정에서의 이데올로기 문제’, ‘법률과 전술’, ‘프롤레타리아독재기의 합법성 문제 등 총3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7 로자 룩셈부르크의 러시아혁명 비판 대한 비판적 고찰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성격: 농업문제와 관련하여’,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성격: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역사발전의 유기적 성격과 폭력적 성격’,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의 국가의 역할’, ‘ 조직의 문제: 기회주의와의 투쟁의 문제’, ‘조직문제의 전술적·정치적 결과, ‘프롤레타리아독재기의 자유의 문제 등 총7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8 조직문제의 방법론 조직문제의 의의’, ‘자연발생성과 의식성: 필연성과 자유’, ‘당과 당원의 관계: 규율의 의의’, ‘당과 계급의 관계’, ‘전술과 조직 등 총5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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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에서 루카치는 맑스주의에서의 정통성을 규정합니다. 그에게 정통성이란 방법론과 관련된 것으로, 텍스트를 섬기는 훈고학 혹은 특정한 주장들에 대한 동의와는 무관한 것이라   있습니다.  방법론이란 특정한 변증법으로서, 유물론적 변증법을 가리킵니다. 그는 유물론적 변증법이 혁명적 변증법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관한 문제를 사고할 필요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참된 유물론적 변증법에 있어, 이론과 이론의 대상이 갖는 관계는 유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조인데, 이러한 유기성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론은 다만 한갓 대상에 외부적인 것으로 머물기 때문입니다. 루카치는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통일될  있는 조건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등장으로 인해 가능해졌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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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결과를 낳고 가장 눈에 띄는 분열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분리에서 나타납니다. 맑스는 이러한 분리가 허용될  없음을 되풀이하여 지적했고 모든 경제투쟁은  본질상 정치투쟁으로 전화합니다.  거꾸로 정치투쟁도 경제투쟁으로 전화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의 의식적 변혁이라는 과제를 역사에 의해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계급의식 속에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궁극목표와의 변증법적 모순 개별적인 계기와 전체와의 변증법적 모순이 생길  밖에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발전과정의 개별적 계기는  구체적 요구를 동반하는 구체적 상황은  본질상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해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에 지배받고 있으며  사회의 경제구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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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라는 역사적 단계에서 정치경제체제를  포괄하는 총체성을 담지하는 다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스스로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면서 계급 자체를 폐지할 역사적 사명을 부여 받고 있으므로  계급의 의식  노동자 계급의식은 독자적이지 않고 대자성을 넘어 총체성을 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역사와 계급의식이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역사 속에서  물화된 관계 아래 소외된 노동을 하는 다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을 정립하는 개념화  추상화 과정이며 이는 맑스주의 변증법적 방법론에 의해 정립됩니다. 루카치의 추상성은 러시아 볼셰비키나 독일 사민당으로 부터도 비난을 받았고 그는 모스크바 망명 시절 철학을 떠나 미학에 몰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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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계급의식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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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계급의식" 1 세계대전을 전후로  유럽의 현실에 대한 절망감과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좌경화된 루카치 자신의 새로운 정치적, 이념적 입장을 이론화한 논문집입니다.  책에서 루카치는 당시 서구 맑스주의 사상을 주도하던 이른바 속류 맑시즘을 보다 심원한 철학적 차원에서 재해석함으로써, 현실적, 정신적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당시 서구 부르지와 지식인들을 맑스주의로 이끄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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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방법론과 총체적인 세계 이해를 강조하는  책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비록한 신맑스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루카치는 1930년대와 40년대에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스탈린 시대의 정치적 곤경 속에서도 꾸준히 리얼리즘 이론가로 활동했고, 서구 부르지와 문학과 미학 전통을 논하는 방대한 연구서를 남겼습니다. 1956 헝가리 봉기 이후에는 정치적인 사안과는 거리를 두고, 맑스주의 미학의 걸작, "미적인 것의 특수성" 완성하는  몰두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념적인 이유로 금기시되어 오다가 80년대 중반 이후 부터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각광받기도 했습니다. 특기할만한 것은, 루카치를 문학이론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사회과학 이론가 또는 맑스 해석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소 경직화된 맑스 해석, 예컨대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역규정성 내지는 상호 규정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따위의 입장에서 문제점을 느낀 사람들에게 루카치는 더욱 각광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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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즘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철학적 정초   작업을 규정하는 여러 특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업은 무엇보다 맑스주의의 1원칙으로서 소여의 총체성에 대한 인식과 도달되어야  총체성의 회복을 제시하며, 이를 철학적 방법론으로 체계화 한다는 데에  핵심이 있습니다. 헤겔에게 있어서도 총체성이란 원인이자 결과, 이미 주어진 것이자 도달되어야  것으로서 정립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 이는 극히 헤겔적인 제스쳐입니다. 반면 맑스에게는 이미 총체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자본주의 개념으로 함축된  형태 전환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할 , 예컨대 아침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비평을 하는 식의 공산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묘사조차 맑스는 자본주의적 분할의 폐지를 염두에  것에 가깝지, 총체성의 범주를 전면에 드러내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있습니다.  점은 그가 훗날 스탈린의 비판과 협박을 받아 ‘1930년대에 발굴된 맑스의 초기 작업들을 접하고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헤겔의 소외와 맑스의 소외를 혼동했다 자아비판을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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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보다 강성해진 이론일색의 지적 경향과 맑스주의자들이 사회과학에서 이론으로 대대적으로 전환해왔던 사정을 감안할 , 루카치의 작업은 오늘날 좌파적 인식론이 유지 재생산 되는 데에 있어  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좌파들이 으레 이런 저런 이념과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이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인식론적 비판이론은 맑스 이론에 맞서게 됩니다. 세계가 극단적으로 분리되고,  작인들이 서로 어떤 관련도 없이 자족하는 것처럼 보일 , 무엇보다 좌파들에게 어떤 공동의 목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 이들을 전일적인 관점에서, 개념만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필연적입니다.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서구맑스주의 폄하되는 좌파적 이론의 시발점입니다.  작업은 최초로 맑스주의의 방법론 추상해냄으로써, 맑스주의가 경제, 사회 영역을 넘어  영역으로 확장될  있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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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가 그의 역사 이론을 전개할 , 기계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주요 특징들 중의 하나가 그들의 계급 의식(class consciousness)’이었습니다. 맑스 교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부류의 계급으로 명쾌하게 나눕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그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착취 당하는 노동자 계급이었고, 부르주아는 자본 소유자 계급이었습니다. 부르주아의 계급 의식 노동자의 산출물을 도둑질하면서 그들을 착취하는 것이고,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식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결국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맑스 이론의 넘치는 문제들 , 특히 계급 이론에서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문제들 중의 하나는 소위 노동 계급 명료하게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피고용자들  오늘날 중산층에 포함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맑스가 분류한  계급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비판은 타당하지만, 이것은 맑스 이론의 보다 중요한  측면과  이론이 20세기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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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판은  계급으로의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하지만,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를 정의하고 구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맑스 이론은  계급은 자신의 계급 의식 수행할(would) 것을 단호하게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수행해야 된다(should) 라든지 또는 수행할 지도 모른다(might) 같은 단순한 주장과는 배치되는 표현입니다.  절대 명령은 시민들이 어떤 계급에 속하는지를 구분하는 아주 분명한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레닌은 맑스 교리에 따라 러시아 시민들을 아주 간단하게 구분했습니다. 혁명의 이념에 동의하는 러시아 시민들은 그들의 지위와 신분에 상관 없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하며, 혁명에 반대하는 자는, 불이행으로, 그들의 적인 부르주아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환 논법(circular reasoning)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맑스주의 교리와 일관됩니다. 왜냐하면 맑스의 계급 이론을 교리로 해석하면 이런 논리적 순환은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레닌은 진정한 맑시스트가 아니라면서 떼를 지어 달려드는 현대 맑스 옹호자들 때문에 강조할 가치가 있습니다. 어쨌든, 레닌이 1917 10 혁명에서 받아들이고 적용했던 것이 맑스 이론의 해석이었습니다. 그것은 소련이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한 폭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저명한 소련 역사가인 마르틴 말리아(Martin Malia) 그의 역저 소련의 비극(Ths Soviet Tragedy)’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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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바라보는 두 맑시즘 레닌이즘이라는 세계관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계층만 존재했습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그것이었습니다. 어떤 정치인도, 그의 실질적인 계급이 무엇이든지 상관 없이, 혁명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자동적으로 부르주아이고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레닌주의자 측은 실제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했으며 현실의 삶보다 우선되는 이념적 의식(consciousness)’ 레닌이 이해하는 계급투쟁이었고 그의 정치를 이끌고 가는 동력이었습니다. 말리아가 지적했듯이 레닌 당의 초기 조직은 노동자 농민 당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혁명당(revolutionary party) 주로 대단치 않은 지식인들 지지를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이들 지식인들은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부르주아라고 간주될  있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혁명 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혁명의식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프롤레타리아이다라는 순환 논법을 동원함으로써, 레닌은 마르크시즘에 따라 다음과 같이 주장할  있었습니다. 레닌의 혁명당은 노동자의 혁명을 대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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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당은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고전적인 구조를 지녔습니다. ‘민주적이라고 불리어 왔다는 점이 1917 볼셰비즘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때의 민주주의는 단지 노동자라는  계급의 사람들만을 위해, 그리고   안에 있는 정치인들만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의 기반인 레닌주의 이념 속에는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과 정치적으로 경쟁적인 조직들은 부르주아 또는 유사-부르주아 계급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프롤레타리아의 당이 권력을 잡았을  제거되어야  대상이었습니다. 레닌은 맑스 이론을 러시아라는 특별한 여건에 적용하는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 맑시스트(neo-Marxist) 중의 일부는 이것은 맑스에 대한 정직하지 못한 해석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명확히 잘못  주장입니다. 노동자는 맑스가 말하는 소위 계급 의식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다고 맑스는 생각했습니다. 레닌이 권력을 잡았을 , 그는 아주 분명히 맑스 사상을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반대 세력이라면 사회적 신분과 관계 없이 누구든지 () 부르주아로 간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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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의 개혁을 단행한  계급 구분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이해하는 데도  개념은 중요합니다.  나라의 모든 자본을 국가소유로 전환한 , 시민을 자본 소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공산당을 지지하느냐 아니면 이에 반대 하느냐는 의식 (consciousness)’ 따라 구분함으로써, 소련 시민들을 쉽게  계급으로 나눌  있었습니다.  결과는 부농(富農)’ 클라크(kulak)들을 강제노동수용소로 내치는 것이었고 요구되는 의식(consciousness)’에서 멀어진 적들을 정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맑스 계급 이론을 교리적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사상 통제하여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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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상품구조로 사물화의 체계를 파악했다면 루카치는 베버의 생각을 빌려 사물화를 의식과 관련시킨 점이 다릅니다.  베버가 합리화의 요체를 탈신비화 탈주술화라 보고 자본주의 체제의 가능성을 찾은 반면 루카치는 거꾸로 합리화 과정이야말로 인간 이성이 스스로 마비되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루카치는 사물화의 극복, 혁명의 동인(動因) 심각하고 철저한 비인간화를 겪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의 성숙에서 찾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합리화 과정에 대한 이같은 비판은 뒤에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등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나타납니다 소련이 레닌에 이어 스탈린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관념적인 냄새 짙은 루카치 이론은 혁명가들에게 달갑지않게 받아들여졌습니다. 1923년 루카치는 책을 출간하자마자 공산당의 비판에 부딪혔고 결국 10 만에 스탈린의 협박에 의해 책의 가치를 부정하는 자아비판의 지경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루카치는1967년에도 후르시초프의 협박에 의해 수정과 재정립이라는게 스스로의 총체성  추상성의 원인을 1920년대 당시의 세계 혁명의 낙관성에서 찾는다는 다소 어설픈 자아비판을 했습니다. 루카치는 살아생전 이 원하지 않았던 자아비판들은 스탈린과 후르시초프의 협박때문이었다는 회고를 직접 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함에도 학계에는 이 혼돈의 자아비판을 분석하고 옹호하는 논의들이 범람하여 루카치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루카치의 본심이었을까요? 우수한 책의 내용만 보아도 스탈린과 후르시초프의 압력으로  책을 부정하도록 강요받았던 것을 능히 알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맑스-레닌주의를 저버린 스탈린 사상과 갈등하는 비판정신 감지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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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루카치는 스탈린과 후르시초프가 맑스-레닌의 정신을 더이상 호도하지 말고 1917년 맑스-레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진지하게 독자에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35번째 책 인문학 부문 5번째 책 루카치 죄르지 (Lukács György) 1923년에 출간한 역사와 계급의식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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