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033.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이야기

by 黃薔 2022. 12. 4. 16:27

본문

반응형

https://youtu.be/QG8f8iAfYMM

33.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1920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33번째 책 인문학 부문 3번째 책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1920”판을 시작합니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생애

 

막스 베버의 본명은 에밀 막시밀리안 베버(Karl Emil Maximilian Weber, 1864~1920)’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막스 베버의 이름을 따라 그냥 막스 베버라고 부릅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커다란 명성을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베버는 1864 4 21일 당시 프로이센의 영역이었던 독일 튀링겐주의 에르푸르트시에서 친가와 외가 모두 신교 집안인 막스 베버 1세의 일곱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루터파 집안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해온 가문으로 국민자유당의 부유하고 유력한 정치가이자 공무원이며, 어머니 헬레네 팔렌슈타인(Helene Fallenstein, 1844~1919) 프랑스 출신 위그노계로 절대적인 도덕 신념을 견지한 칼뱅주의 개신교도였습니다. 법률가인 아버지 막스 베버 1세는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세속적인 인물로 베를린에서 정치가로 공직 생활을 하면서 1869 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되고 그의 가정도 정치와 가까워졌으며, 그의 살롱에서는 당대의 여러 주요 정치가 학자와 유명 인사가 드나들어 교류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베버는 어머니의 칼빈주의 프로테스탄티즘 인생관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저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도 칼빈주의를 통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고방식과 삶의 목표가 다른 어머니와 아버지의 차이는 어머니를 닮은 막스 베버와 쾌락주의적이고 세속중심적인 삶을 동생 알프레드 베버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알프레드 또한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였지만 삶의 양식에 있어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베버가 13살이던 1876 성탄절에 부모님에게 선물은 편의 역사 평론인 "독일 역사의 과정에 관하여: 황제와 교황의 지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덧붙여" "콘스탄틴에서 민족들의 이주 시기의 로마 제국에 관하여"였습니다. 14 그는 호머, 베르길리우스, 키케로, 리비우스를 주석으로 글을 썼으며, 대학 진학 전에 괴테,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에 대한 지식을 섭렵하며 사회 과학 분야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1882 베버는 고등학교(김나지움) 졸업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법대에 입학하였습니다. 베버가 법률을 택한 데는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법률가인 아버지를 본받아 법률가로서 직업을 얻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한 법률가로서 국가관료로 진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해 가면서 기업들이 법률전문가들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으므로 시민계층은 법학을 선호하고 있었습니다. 법학 공부를 하는 동시에 젊은 베버는 경제학 강의를 듣고, 중세 역사, 철학,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당시 독일 대학생들은 맥주를 마시고 결투를 의례적으로 하곤 했는데 베버 역시 이에 어울려 병약 청년에서 꽤나 건장한 젊은이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는 1883년엔 잠시 스트라스부르에서 독일군으로 복무하였습니다. 1884 가을에 베버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수학하고자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8 동안 괴팅겐 대학교에서 , 그리고 잠시 군사 훈련차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을 빼고 베버는 부모님의 집에서 머물며 처음에는 학생으로, 나중에는 하급 법정 변호사로, 나중에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강사로 일하였습니다. 1886 베버는 괴팅겐 대학에서 국가시험을 치르고 대학 학부교육을 마쳤고 변호사 자격시험에 해당하는 "참조인"(Referendar)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1880년대 말에 베버는 역사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박사 논문과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쓰는 사이 동안 베버는 당시 사회 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888 그는 역사학파 독일 경제학자들의 새로운 모임인 "사회정책학회(Verein fur Socialpolitik) 가입하였습니다. 이들은 경제학의 역할은 우선 당시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경제 문제에 관한 대규모 통계 연구를 주창하였습니다. 그는 정계에도 발을 들여 좌파 성향의 복음주의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하였습니다.

 

1889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박사 학위논문 중세 사업 조직의 역사 - 중세 상사(商社)회사 서설이라는 제목의 법제사에 대한 박사 논문을 심사한 사람이 바로 로마사로 유명한 테오도르 몸젠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려면 학위 신청자가 자신의 논문에 관해 제시한 논점 3 개를 두고 여타 학자와 신청자가 토론해야 했습니다. 로마사 분야 최고 권위자인 몸젠은 베버가 '식민도시(colonia)' '도시(municipium)'에서 자신과 이견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베버의 의견에 질문했으나 얼마간 토론한 '베버의 논제가 옳다는 것에 승복하진 않지만 수험자의 앞날을 방해할 마음은 없다' 말하면서 토론을 끝마쳤고 베버의 박사 학위논문 심사는 그렇게 통과되어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베버는 몸젠과 편지를 자주 교환하면서 로마사를 대상으로 의견을 호환했습니다.

 

1890 "폴란드 문제" 지역 노동자들이 당시 급속히 산업화되던 독일 도시로 이주하면서, 독일 동부로 외국인 농장 노동자들이 유입하던 것을 뜻하는 동부이동(Ostflucht)”을 연구하기 위해 "학회"(Verein) 설립되었습니다. 베버는 연구에 뛰어들어 결과물의 상당 부분을 썼습니다. 1891 베버는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논문인 "로마의 농업사와 공법 사법에서 중요성" 완성하였습니다. 논문은 뛰어난 경험적 연구 저작으로 널리 찬사받았으며, 농업 경제학 분야에서 베버의 명성을 굳혔습니다. 베버는 이제 독일에서 교수직 자격인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 획득하여 1892년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시간강사"(Privatdozent)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1 후인 1893 부교수로 로마법, 독일법 상법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1893 초가을 베버는 그의 5촌 조카인 마리안네 슈니트거(Marianne Schnitger, 1870~1954) 결혼하였는데, 나중에 사람은 여성주의자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작가가 되어, 베버가 죽은 남편의 학술지 논문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기여하였습니다. 그녀는 윤리적 목표가 고상하고 의지가 강한 점에서 베버의 어머니와 비슷했습니다. 어머니와 부인은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위인으로 만들려는 보이지 않는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베버와 마리안네는 서로를 부인과 남편을 넘어 정신적인 동반자로 간주했습니다. 마리안네는 남편을 훌륭하게 내조했으며, 학문을 통해 지적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1894 30세의 나이로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됨으로써, 독일 학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어 1897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경제학 재정학 정교수로 초빙되었습니다.

 

정치인이자 법률가였던 베버의 부친은 루터파 였지만 독실한 칼뱅주의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모친과 상반된 경향을 보였고 사이에서 베버는 혼란을 느꼈으며 특히 아버지와 갈등이 많았습니다. 베버의 부친은 아내에 대해 군림하는 성격이었는데 베버의 모친이 자녀들을 방문하여 주씩 함께하곤 하던 여행을 통제하려 하자 1897 베버는 일로 부친과 크게 싸우고 화해하지 않은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뒤에 부친이 사망합니다. 부친과의 싸움과 직후의 부친의 죽음 여러 스트레스로 인해 베버는 점차 신경 과민과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어 교수직을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의 상태 때문에 자신의 수업도 줄어들었고, 1899 가을 마지막 강의는 끝내지도 못했습니다. 1900 여름과 가을에 요양소에서 달을 보내다가 베버와 아내 마리안네는 말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으며, 1902년에야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

 

1890년대 초에 왕성한 저작 활동을 했지만 부친에 대한 죄의식으로 베버는 1898 초부터 1902 말까지 전혀 글을 출판하지 않았으며, 1903 가을엔 교수직을 떠났습니다. 1903 이후 베버의 저작들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신경쇠약 이전의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역사경제학의 교수로, 역사경제학의 관점으로 저작들이 저술되었으나 시기 이후부터는 사회학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베버는 사회 과학과 사회 정책(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학술지에서 동료 에드가 야페(Edgar Jaffé)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 함께 공동 편집장직을 맡으며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의 객관성이라는 중요한 방법론 논문을 집필한 역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저술합니다. 책의 1부는 1904 발표했으며 이후 아내 마리안네 슈니트거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청교도와 자본주의의 관계 양상을 관찰한 1905 2부를 발표합니다. 아내 마리안네는 후일 베버의 삶과 사상, 학문을 정리한 베버의 전기 막스 베버를 출간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이 되었으며, 나중에 그가 경제 체제의 발전에 문화와 종교가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 연구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저작은 베버 생애에 출간된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해에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세인트 루이스에서 루이지애나 만국 박람회 연계한 예술 과학 회의에 참가하였습니다. 베버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자신이 그때 일반 강의를 다시 맡을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1907년에 유산을 받아 개인 학자로 계속 활동하였습니다. 이후부터는 학자로서 게오르그 짐멜, 야스퍼스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1910 독일 사회학회의 창립을 도우며 사회과학의 가치중립성과 객관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전에 사변적 철학 경향을 띠었던 사회학 제반 학문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연구 방법이 도입된 사회과학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1912 베버는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규합하기 위하여 좌파 정당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아마도 여러 자유주의자들이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혁명 이념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 세계 대전 동안 베버는 하이델베르크의 병원에서 원장으로 잠시 복무하였습니다. 1915년과 1916년에 그는 전후 벨기에와 폴란드에서 독일의 수위권을 유지하려는 위원회에서 일하였습니다. 독일 제국의 확장과 전쟁에 대한 베버의 생각은 전쟁을 거치면서 바뀌었습니다. 그는 1918 하이델베르크에서 노동자 병사 평의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같은 베버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 정전 위원회와 바이마르 헌법 기초를 맡는 위원회에서 고문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의 48조를 삽입하는 지지하였습니다.

 

조항은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포고를 통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이용하여, 히틀러 정부가 반대파를 억압하고 독재 권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버가 독일 정치에 기여한 점은 아직도 논쟁거리입니다. 1 세계대전 이후 1919년 빈 대학과 뮌헨 대학의 사회과학, 경제사 경제학 정교수로 초빙되어 강의를 다시 하기 시작하며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라는 유명 강연을 했습니다. 뮌헨에서 그는 독일 대학에서 최초인 사회학 학회의 회장이 되었으나, 결국에는 개인의 사회학 직위를 갖지는 않았습니다. 베버는 1919년과 1920년에 우파의 선동 때문에 정계를 떠났습니다. 뮌헨의 여러 동료와 학생들은 1918년과 1919 독일 혁명 당시 그의 연설과 좌파적 태도에 반대하였으며, 일부 우파 학생들은 그의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제와 사회 1부를 저술하고 1920 6 14 뮌헨에서 스페인 독감으로 56살을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20세기에 출현한 정신과학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 책은 원래 두편의 논문을 합친것으로서 1904년에서 1905년에 걸쳐 잡지 사회과학과 사회정책학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연재되었던 것입니다. 논문은 '문제'라는 제목 아래종파와 계층’, ‘자본주의 정신’, ‘루터의 직업개념·탐구의 과제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번째 논문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라는 제목 아래, ‘현세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구성됩니다. 베버의 사망 직후인 1920년에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논문으로 발표될 때부터 당시 서구의 지성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늘날까지 자본주의의 발생과 발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중한 고전이 되어 왔습니다. 영역본은 1930년에 탤컷 파슨스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이라는 제목 그대로 번역되었고, 수많은 판본이 나왔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내용

 

베버에 따르면 근대 시민계급은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 개혁을 수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또 자본주의가 아시아가 아니라 서유럽에서 시작됐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종교, 특히 종교개혁을 꼽았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금전추구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윤리적인 통제를 가함으로써 향락 방탕 재산을 낭비하는 일을 절제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금욕하는 것을 윤리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이렇게 얻은 자산의 양은 그의 신앙의 진실성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이는 재산의 획득을 윤리적으로 정당화하여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을 돕습니다. 이와 같이 신이 내리신 직업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여야 한다는 청교도적 세계관은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베버는 책에서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의 발생과 그것의 근본 정신은 16세기에 발흥한 개신교윤리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개신교 윤리는 소위 '현세적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 관련된 분야에서 영향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개신교 윤리에 따라 자신의 기업 혹은 계약을 발달시킴과 함께, 재투자를 위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베버는 이런 이유를 들어 직업소명설을 주장한 칼뱅주의 개신교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고 책에서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개신교 윤리는 자본주의의 발달을 이끈 비계획적이고 비동력적인 힘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베버 명제라고도 합니다. 그렇다고 베버는 자본주의 출현의 근본 원인이 프로테스탄티즘에 있다고 단순하게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베버는 임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 자본주의가 출현하려면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하나는 합리적인 법률 구조와 이를 공정하게 집행할 있는 훈련된 관료들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적 경제정신’,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가지 요소는 각각 개별적으로 발생할 있으나, 가지가 우연히 결합될 혁명적인 결정체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자본주의 정신이란 인생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모든 즐거움을 엄격하게 회피하면서 점점 많은 돈을 버는 것입니다. 정신은 절제되고 근면한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하고 노동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근대 노동계급을 탄생시키는 필요했습니다. 베버는 동양에서는 이런 자본주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서유럽에서는 바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여파로 이런혁명적정신이 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중세 시대에 돈벌이란비열한 ’, 더럽고 죄를 짓는 것으로 취급됐습니다. 돈이란부정 이득이었으며 가끔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런 중세의 전통적 문화를 뒤흔들었습니다. 루터와 칼뱅의 가르침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한 루터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이 내린소명이나천직 있다는 교리를 설파했습니다. 루터는 속세에서 벗어난 신성함을 추구하던 가톨릭의 전통에 반대해진정한 신성함이란 세상에서 맡은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베버는 루터의 가르침으로 일상생활에서의 노동이 하느님이 맡긴 임무가 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베버가 보기에 종교개혁에서 더욱 혁명적인 요소를 끌어낸 것은 칼뱅이었습니다. 칼뱅은 신이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것인지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예정설 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신이 과연 선택된 사람인지 아닌지 불안해 했습니다.

 

칼뱅파가 자기가 선택됐다고 믿는 ,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이라고 물리치는 것이야 말로 개인의 절대적 의무라고 가르쳤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은 신도들을 금욕주의로 이끌었습니다. 게으름과 시간 낭비가 가장 죄악이 됐습니다. 모든 것이 소명 추구에 동원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축적된 부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징표였습니다. 아무도 자본가가 되려고 프로테스탄트가 됐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적으로 교의의 심리적 효과가 의외의 결과를 발생시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저축이라는 금욕적 충동을 통해 자본축적이 이뤄졌고, 여러 사업장에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인생의 목적으로 일에 매달리며, 맑은 정신을 지니고 성실하며 매우 근면한 일꾼을 제공했습니다. 이 책에서 베버는 어떻게 사상이 역사의 실질적 힘이 되는지를 보여 주려 했습니다. 베버는 관념이 경제적 상황의 반영이나 상부구조로서 시작한다는 맑스주의적 사적유물론을 공격했습니다.

 

물론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과 발흥하는 자본가 계급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것은 사실이긴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봉건 질서와 귀족 제도에 직접 연결돼 있던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란으로 간주됐습니다. 따라서 종교 사상 자체가 자본주의 세력의 반란을 자극하는 커다란 구실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베버는 루터의 종교 사상이 당시에 광범한 지지를 얻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럽 사회는 일종의시장 봉건주의가 팽배했습니. 시장이 확장되면서 생긴 불안은 봉건제도와 교회로 하여금 농민들에게 세금과 십일조 등으로 많은 수탈을 하게끔 강요했습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 수탈의 문제점을 제기했기 때문에 커다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베버가 제시한 것처럼 추상적·신학적인 것이었을 아니라, 종교적·사회적·정치적 요구를 융합시킨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지표를 보면 17세기 이전 봉건제도의 골격 안에서 자본주의가 팽창하기 시작했음을 있습니다.

 

종교개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도시의 여러 계층에게소명 같은 관념이 새로운 뜻을 지니게 것은 바로 봉건제도 아래에서 자본주의와 시장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자본주의적 산업이 발달하던 당시의 사회에 어울리는 신앙의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다는 명제를 뒷받침하려고 프로테스탄트 신학 교리 가운데 일부만을 선별했습니다. 적지 않은 영국의 여러 프로테스탄트 저작에는 부의 축적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베버는 이를 외면했습니다. 베버가 자본주의 발흥의 물질적 조건을 무시하다 보니, 초기 자본축적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좀체 설명하지 않습니다. 식민주의의 가혹한 현실은 물론이고 초기 노동계급에게 시간제 노동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무지막지한 테러가 자행된 사실 등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베버는 자본가들을 금욕적이고 성실한 도덕적 인간으로 치켜세우고, 자본주의의 기원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일조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했을까?라는 베버의 오해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중국이나 페르시아, 인도같은 아시아는 유럽보다 훨씬 발전한 곳이었습니다. 아시아의 부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유럽 여러 나라의 그것보다 컸습니다. 산업 기술도 유럽의 수공예 산업이 소유하지 못한 섬세함과 전통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서구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사용하는 근대적인 방법에도 아시아의 상인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신용거래, 자금 조달, 보험, 카르텔 등의 문제에서도 인도, 페르시아, 중국 등이 유럽으로부터 배울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자 나라들은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경제는 침체됐으며, 유럽의 공장에 필요한 1 생산품의 공급자가 됐습니다. 베버는 종교 때문에 인도와 중국에서 토착 자본주의가 출현할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서구의 산업 발달에 방아쇠를 당긴 것과 달리, 아시아에서는 불교를 포함한 힌두교와 유교가 자본주의의 출현을 방해했다며. 베버는 인도의 종교, 중국의 종교에서 문제를 다뤘습니다.

불교를 포함한 힌두교 교리를 보면, 현세에서 얼마나 윤리적이었느냐에 따라 무엇으로 환생할지가 결정됩니다. , 카스트 의무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따라 창자의 벌레로 환생할 수도, 여왕이나 브라만의 딸로 환생할 수도 있습니다. 베버는 기술적 변화와 직업적 이동성을 가로막는 폐쇄적 신분제도인 카스트 질서가 자유 시장의 경쟁을 막았다고 봤습니다. 모든 직업의 변경, 모든 작업 기술의 변경이 교리상 타락을 야기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힌두교 내부에 경제적·기술적 혁명을 일으킬 없었으며, 자본주의를 쉽사리 배태할 수조차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는 종교가 아니라 인도 사회의 정치경제적 특징이 저개발의 원인인데 말입니다. , 대외무역의 양상, 산업의 지역별 배치, 신용 제도의 성격 또는 토지 자본의 축적과 도시로의 이전 사이의 상관성, 인도의 정치 구조, 또는 무굴 제국의 침공과 뒤이은 붕괴가 미친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효과 등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베버의 인도의 종교에는 이런 논의가 전혀 없습니다.

인도 자본주의 탄생을 방해했다고 베버가 주장하는 폐쇄적인 카스트 제도도 사실은 서양 지배의 산물일 뿐입니다. 영국이 인도인은 너무 분할되어서 인도를 국가로 발전시킬 없다는 생각을 주입하려고 이전에는 여러 종파가 느슨하게 결합된 것에 불과했던 힌두교를 종교와 비슷한 것으로 만들고 카스트 서열을 굳건하게 하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베버는 영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인도의 발전을 얼마나 저해했는지에 대해 어디에서도 다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도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찬양까지 합니다. 이부분에서 일제가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떠드는 친일어용학자들의 망언들이 오버렙됩니다. 이처럼 베버가 식민 지배의 결과를 간과한 것은 그가 인종차별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종교에서 베버는 동양인들이 서구인들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라고 전제했고, 아시아인의 무제한적인 탐욕을 비난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자연히 식민 지배 정당화로 연결됩니다. 베버는 인도에서 소수 유럽인 지배층과 그들이 부여하는 영국에 의한 평화Pax Britannica 제거하면 적대적 카스트, 종파, 종족 사이에 목숨을 투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중국의 종교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베버가 중국의 종교에서 물질적 요인과 정신적인 요인을 연결시켜 포괄적으로 설명하려 애쓰긴 했으나 결국은 다시 종교로 돌아갔다고 비판합니다. 베버는 중국의 관료제를 주도한 지식 계급의 종교인 유교에 주목합니다. 베버는 중국 지식 계급의 문화를노인 문화로 봤고 유교를 예절과 세상에 대한 적응을 권장하고 하느님이나 정신적인 왕국의 이름으로 세상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하는 다른 종교들 같은 혁명적 힘이 없는 종교로 치부했습니다. 중국 사회에 대한 베버의 분석에서도 유럽인의 우월감이 엿보입니다. 전쟁과 대립으로 점철된 유럽의 역사는 발전과 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된 반면에, 중국 사회는 정체된 관료제를 만들어 평화주의 때문에 괴멸되었다고 악평을 합니다. 베버는 전쟁이 역사를 진보시키는 동력이라는 견해도 피력했습니다. 베버는 중국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그는 중국인들이 특히 지적인 분야의 특이한 자극에 느린 반응을 보이며 중국어가 체계적 사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어의없는 비난을 했습니다. 베버는 중국의 쇠퇴 요인을 종교의 근본적 결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는 유럽 봉건제의 위기가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우 혁명적인 수단에 의한 부르주아지의 발흥으로 극복됐지만, 중국에서는 귀족들이 상인들을 강력하게 제어하는 성공하고, 아래로부터의 약진을 억눌렀기 때문에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합니다. 베버는 명나라 왕조는 상인 계층이 지배의 기초를 혼란시킨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을 적대시했고, 인도와 아프리카 원정을 끝내고 해외 무역을 중단시키려고 했고, 왕조가 농민 반란에 직면해 무너지자 상류층은 대부분 만주 왕조인 청나라에 충성을 다짐했다고 오해했습니다. 베버는 인도를 분석할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해서도 식민 지배의 결과를 전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컨대 영국은 1841 난징조약에 따라 중국에 아편을 반입할 있는 권리를 획득했을 아니라 수십 동안 관세 정책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는, 이것이 중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음양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설명은 쏙 빼버렸습니다. “중국의 종교 인도의 종교에서 베버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정신 형성에 프로테스탄티즘을 돗보이려는 그의 중심적 명제를 뒷받침하려고 인도와 중국의 오랜 경제 발전 역사를 무시하고 나라들을 정체되고 수동적인 사회로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식민 지배가 인도와 중국의 저발전에 미친 악영향을 무시해서 나라들의 정체를 종교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권의 책은 제국의 창조를 정당화하고자 제국주의의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이제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저술한 목적이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우선 베버는 맑스주의적 분석형태를 논박하고자 했습니다. 21세기에도 빈곤은 사라지지 않을까? 자원이 부족해서일까, 부자들의 욕심 때문일까? 왜 전쟁은 끊이지 않을까? 전쟁 없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왜 여성들은 아직도 차별받을까? 온갖 흉악 범죄는 왜 발생하는 걸까? 대체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불평등하고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인가? 사회학은 이런 물음에 답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설명하고자 생겨난 학문입니다. 사회학은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놓고 갈등하는 장입니다. 동료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가난이 개인의 게으름 탓이냐 불평등한 사회구조 때문이냐 하는 토론이 벌어지듯이 사회학에서도 사회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런 논쟁은 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를 둘러싼 논쟁이고 고전 사회학 내부에서 논쟁의 승자는 베버입니다. 베버는 마르크스와 달리무리하게현대 사회를 양대 계급 모델로 파악하거나경제결정론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베버는 복잡한 다계급 모델과 다수 요인에 따른 인과관계를 중시했습니다. , 베버는 당파성에 기초를 두고 노동계급 혁명을 옹호한 마르크스와 달리 연구자의가치 중립을 주장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베버는 마르크스에 대항할세련된대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는 베버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습니다. 베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마르크스주의 정치에 도전하고자 했습니다.두번째 자본주의 문화가 서유럽에서 출현했고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통해 서유럽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가치가 주로 특정한 방향으로 사람들의 이해관심을 조종함으로써 사회적 행위를 제한했다는 점을 종교개혁을 통해 입증하고자, 근대 자본주의가 다른 지역이 아닌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발흥했는지 베버는 역사적 사건들의 원인을 통해 실험적 설계(quasi-experimental designs)를 구성했습니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

 

베버는 철저한 엘리트주의자였습니다. 베버의 사회학은 권력 엘리트가 역사의 참된 주체이며 대중은 불가피하게 수동적이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버가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을 끔찍한 일로 여긴 것은 당연했습니다. 소비에트를 통해, 그리고 볼세비키 같은 대중 정당을 통해 조직된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할 있다는 생각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 끔찍했습니다. 1917 러시아 혁명이 터졌을 베버는 독일 노동자들이 러시아 노동자들을모방 투쟁에 나설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래서 베버는 러시아 혁명을 다룬 글에서 부르주아지의 결정적 구실을 부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베버는 러시아 노동자의 자주적 행동을 소홀히 다뤘으며, 그들을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볼모로 간주했습니다. 베버는 독일 혁명 당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앞장섰습니다. 베버는 리프크네히트는 정신병원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물원에 가야 한다철저하게 부르주아 계급의 편이었습니다.

 

베버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학자들은 칼벵주의 신학자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베버는 가지 유산을 남겼습니다. 먼저, 국가 발전의 동력을 찾는 데서 내재적인 문화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는 베버의 방법은근대화 이론가들에게 계승됐습니다. 인도와 중국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힌두교와 유교 때문이라고 베버가 주장했듯, ‘근대화 이론가들은 저개발 국가들의 미발전이 그들의 문화 탓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대로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들은 기업가 정신을 북돋워서 그렇게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매우 유용한 논리입니다. 둘째, 베버의다계급 모델이론은노동계급은 죽었다 말하는 이론가들에게 자양분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블루칼라 노동자의 차이를 과장하려는 사람들에게 베버의 이론은 매우 유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로부터의 변화는 관료주의적 악몽으로 이어질 뿐이라는 지배적인 견해에서도 베버의 유산을 발견할 있습니다. 이런 이론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론인, 역사유물론, 노동계급의 혁명적 구실, 사회주의적 전망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소련 붕괴 뒤 베버의 영향력은 더 커졌습니다. 일찌감치관료제의 위험을 경고하고, 노동계급은 분열해 공통된 정치적 목표를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했던 그의 주장이 입증된 듯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베버는 사회학계에서 가장 위대하며 가장 숭배되고 조용히 존경을 받는 권위자가 됐습니다. 상인 출신 국회의원의 아들인 베버는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이자, 철저한 자본주의 옹호자였습니다. 베버는 개인 사이의 경쟁적인 투쟁을 가장 소중히 해야 할 최상의 가치라고 봤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상상할 수 있고 실현 가능한 것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체제로 봤습니다.

 

베버는 시장이 사람들의 욕망에 대해 분명하고 합리적인 한계를 설정한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시장을 폐지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가격을 결정할 방법이 없습니다. 베버가 노동자들의 이해를 보호하고 자본주의의 인도주의적인 측면을 요구한 점에서 때때로 마르크스에 가깝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이미지는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베버가개인주의적 이기심이 모든 진보의 동기가 되는 힘이라고 생각했고, 자본주의를 엄청난 불평등을 야기할지도 모르지만 기술적으로 능률적일 수 있는 유일한 체제로 봤습니다. 그러함에도 마르크스주의는 오늘날 여전히 유효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가 낳은 오물들인, 전쟁, 환경 파괴, 불평등, 착취에 맞서 싸웁니다. 특히, 사람들은 2008 세계경제 위기를 겪은 자본주의의 대안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막스에 대항한 서구 자본주의 이론이 아쉬웠던 시대에 편승했던 베버는 어쩌면 식민제국주의 옹호자였으며 서구와 아시아를 가르는 인종주의자 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든 부분이 있는건 사실입니다.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책 100선 중 33번째 책 인문학 부문 3번째 책 막스 베버(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1920”판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